[전성민의 디지털 창업사] 〈1〉전산화 혁명의 설계자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

2026년 강남의 사무실, 엔비디아의 최신 칩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스타트업 대표의 모습에서 반세기 전 청계천에서 기판에 납땜질을 하던 청년의 간절함이 겹쳐 보인다. 이 기묘한 '타임 슬립'은 대한민국 정보기술(IT) 산업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외치는 인공지능(AI) 데이터 주권의 뿌리는 사실 1960~1970년대, IT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황무지에 뿌려진 집념의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IT 도입의 시작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남전 파병 결정 이후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결실로 유입된 미국 원조(US Aid) 1000만달러. 박정희 정부는 파격적으로 기술연구소 건립을 선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해외에서 활동하던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KIST 선임연구원의 월급은 국립대 교수의 3배에 달했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 “오직 연구에만 매진하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 요람에서 삼보컴퓨터 창업자 이용태 박사,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교수와 같은 거인들이 함께 숨 쉬며 기술 자립의 꿈을 꾸었다.

1980년대 초, 이 축적된 에너지를 국가적 혁명으로 폭발시킨 인물들이 바로 'IT 그랜드 디자이너' 오명 전 부총리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전자공학 박사였던 오명은 서구 열강이 수백년간 쌓아온 산업화를 단숨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선언을 통해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기술계에 경종을 울렸다. 당시 정치가들은 컬러TV가 보급되면 국민들이 일은 안 하고 TV만 보며 사치에 빠질 거라며 TV 생산 자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오명은 컬러TV 생산이야말로 가전과 부품 산업의 연쇄 혁신을 끌어낼 국가 경쟁력 확보의 사활이 걸린 문제임을 역설하며 끝내 생산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성과는 오명 전 부총리와 기술 관료들이 구축한 '무적의 삼각 편대(Iron Triangle)' 덕분에 가능했다. 이 모델은 강력한 권한을 가진 청와대가 정치적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후에 정보통신부가 된 체신부가 현장의 실행력을 발휘하며, 국책연구소가 실전 기술을 제공하는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부처마다 자기 이익만 챙기던 관료 사회의 고질적인 이기주의는 이 무적의 삼각 편대가 내세운 '컴퓨터와 통신(C&C)' 패러다임 앞에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처리하는 '뇌'인 컴퓨터와 그 정보를 실어 나르는 '혈관'인 통신을 하나로 합치겠다는 이 설계도는 정보화 사회를 향한 거대한 마스터플랜이 되었다.

가장 눈부신 실질적 성과는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이었다. TDX는 수백만명의 전화를 순식간에 연결해주는 일종의 컴퓨터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0번째로 개발에 성공하면서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당시 선진국들이 조 단위의 예산을 쏟아부을 때 한국은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자원으로 TDX 개발에 도전했다. 여기서 오명의 천재적인 경영 감각이 빛을 발한다. 그는 예산 당국의 반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실패하더라도 기술을 이해하게 되면 외국산 장비 가격을 깎는 협상 카드로 쓸 수 있으니 무조건 남는 장사”라는 논리를 폈다. 다른 한편, 연구원들에게는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이른바 'TDX 혈서'를 쓰게 하며 목숨을 건 몰입을 이끌어냈다. 이때 만들어진 정부-기업-연구소 공동개발 모델은 삼성, LG, 현대 경쟁재벌들을 협력하도록 했다. 이 독특한 협력 구조는 훗날 세계를 놀라게 한 4메가 D램 반도체 신화를 일구게 됐고, 또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초고속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경영사적으로 볼 때, 1980년대의 전산화 혁명은 2026년 우리가 마주한 AI 패권 전쟁의 '데칼코마니'다. 당시 오명이 외산 기술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국산 주전산기 도입과 유닉스(UNIX) 표준화를 밀어붙였던 절박함은, 오늘날 엔비디아와 오픈AI의 독주에 맞서 업스테이지나 리벨리온 같은 딥테크 스타트업들이 소버린 AI와 국산 NPU를 지키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유사하다. 이번 정부에서 발표한 AI·딥테크 스타트업 1만개 육성 전략은 50년 전 KIST에서 시작된 기술 자립의 유전자가 현대적으로 진화한 모습이 아닐까.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전자신문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