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반도체 시장 판도를 흔들었다. AI 인프라 확산으로 AI 반도체 칩이 대거 필요해졌다. 필수 탑재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도 폭증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가 HBM에 생산능력을 집중하다 보니, 서버·스마트폰·PC에 들어가는 범용 D램 공급이 제한됐다. 이 때문에 다시 범용 D램 가격이 급등하는 이례적 구조가 형성됐다.
메모리 제조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분기마다 메모리 가격이 올라서다. 영업이익도 크게 증가했다. HBM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삼성전자도 지난해 4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메모리 제조사는 꽃놀이 패를 쥐고 있다. 공급자 우위 시장이기 때문이다. 2017~2018년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수요, 2020~2021년 코로나 19 팬더믹으로 인한 공급 제한에 이어 AI 열풍에 힘입은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도래했다.
그러나 반도체 슈퍼사이클 뒤에는 언제나 침체가 있었다. 공급 과잉으로 제조사들은 웨이퍼 투입을 줄이는 '감산'까지 단행했다. 영업이익은 고꾸라지고, 불황의 그늘에서 허덕였다. 수요와 공급의 첨예한 줄다리기에 실패한 것이다.
미래 시장, 특히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는 건 쉽지 않다. 호황일 때 대비가 중요하다. 바로 차세대 기술이다. 지금이야 고객사와 메모리 가격 협상에서 우위에 있지만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첨단 산업이고, 경쟁력은 기술에서 나온다.
슈퍼사이클의 최대 수혜자로 한국 메모리 기업이 손꼽히지만 뒤에는 중국과 미국 업체가 바짝 붙어 따라오는 급박한 상황이다.
눈앞의 실적만 좇다간 앞을 대비하기 어렵다. 자금 여유가 있을 때 빠르게 차세대 기술에 투자, 미래 시장 주도권을 선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황 때 한순간에 뒤처질 수 있다. 오늘의 자만이 내일의 퇴보를 낳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