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임원과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거친 허광호 작가가 은퇴 이후 자신의 삶을 담담히 돌아본 산문집 '오후 5시 쉼표 하나'를 펴냈다. 30여년간 기업 현장에서 보낸 시간을 뒤로하고 철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시점에서 '쉼표'처럼 멈춰 선 사유를 글로 풀어냈다.
책 제목이 상징하듯 작품은 해가 지기 직전 가장 빛나는 시간인 '오후 5시'에 주목한다. 끝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서두르기보다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전반을 관통한다. 빠르게 달려온 삶을 정리하며 성공과 성취 뒤에 가려졌던 감정과 기억을 절제된 문장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시선에는 대한민국 고속성장기를 온몸으로 통과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초상이 담겼다. 고속성장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족들 보다 직장이 우선이었던 세대. 민주화와 IMF를 온 몸으로 겪었던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 글 곳곳에 묻어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보다 담백한 서술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느끼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의 글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성장통을 앓던 한국사회의 중심을 관통한다. 그 속에서 작가는 한국사회의 '남자다움'을 강요 받았다. 말수는 적어야 하고, 인내심이 강해야 하며,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다. 그런 그의 글은 고민을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독자에게 '보여주기' 보다는 '느끼게'하는 방향을 택한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인 권남희 수필가는 “감정은 있으나 노출되지 않고 평면적으로 보이나, 절제된 안정감을 놓치지 않는다”며 “성찰이 없기보다 성찰을 핑계로 남의 생각을 덧붙이는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작가”라고 평했다. 또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산문을 연상케 하면서도 피천득 특유의 순박한 문체를 닮았다고 평가했다.
산문집에는 등단작을 포함해 총 30편의 작품이 실렸다. 부모와의 기억, 학창 시절, 직장 생활, 결혼과 출산 등 개인의 생애사를 따라가며 여행과 일상의 장면들이 교차한다. 특히 돈암동, 강남역, 명동, 성내천 제방길 등 특정 장소를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폐사지와 도보 여행을 통해 인생의 변곡점을 되짚고, 해외에서의 경험은 가족과 역사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권 수필가는 작가의 글을 보며 “한겨울 무를 먹는 열 가지 방법과 같다”고 떠오른다고 설명했다. 단순한 재료지만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최근 기업 경영진 출신들이 은퇴 이후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는 흐름 속에서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을 넘어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과장된 성공담 대신 절제된 성찰로 삶을 풀어내는 방식이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박정은 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