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한국개헌학 원론

한국 정치에서 개헌이 되려면 충족해야 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정치권과 국민의 강한 욕구가 있어야 한다. 둘째, 구체적으로 협의가 가능한 어느 정도의 안(案)이 필요하다. 최근에 제출된 여야 6당 개헌안이 이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짚어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개헌은 필수지만, 6·3 지방선거에 개헌투표를 얹힐 건지는 별개 문제다. 여타 지방선거와 달리 중앙정부의 중간평가나 지방정치 지형을 확인하는 단순 지방선거가 아니다. 6·3 지방선거는 두 번에 걸친 국민적 촛불혁명을 지역의 주인으로서 지역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날이다. 주민은 없고 국민만 존재했던 대한민국 헌법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주민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하는 것이다.

◇6·3 지방선거와 개헌문제

6·3 지방선거가 개헌을 위한 최고의 공간은 아니다. 지금까지 개헌 논의의 관행이 대통령·국회의원·지방선거와 겸해서 실시해 투표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려는 알뜰 제안이었다. 그러나 다른 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할 경우, 막상 각 당의 이해득실 계산에 얽혀 단 한 번도 실시되지 못했다. '수명을 다한 헌법'을 버리고 새 헌법을 마련하기 위해 최적의 날짜를 정하는 것은 결코 소모적인 정치비용이 아닌 그 이상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87체제'를 상징하는 현행헌법이 40년째 묶여 있어서 개헌의 연성화를 위해 단계적 순차적 개헌 시동을 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헌법전문 수정·계엄요건 강화·지역 균형발전 조항 신설의 개헌안은 국민적 관심과 쟁점 사항을 지나치게 벗어나 있다.

개헌의 사회적 합의는 '직접정치의 힘'에서 비롯되기에, 국회와 대통령은 개헌 방법·시기·내용을 정하기 위해 국민의 다양한 의견 수렴에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한다. 개헌의 주체는 국민이고 대통령과 국회는 절차상 제안자일 뿐이다.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한국헌법 개정의 역사

절대 반복하지 말아야 될 한국헌법의 개정 역사이기에 그 근원적인 맹점을 정확히 꿰뚫어 볼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만들어지는 필연적 제정이었으나, 의회주권의 의원내각제와 당시 미국식 정부 형태였던 대통령제의 성찰 없는 결합 내지 야합이 제헌헌법의 민주적 시스템 불안정성을 처음부터 노정시키고 있었다.

제1공화국에서 두 번의 개헌이 있었는데 1차 개헌은 6·25 한국전쟁 중에 이뤄진 것으로서 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당선이 어려운 바, 직선제로 바꿨다. 2차 개헌은 절차상 사사오입이라는 반칙 외에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장기집권이 가능하도록 3선 제한 조항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제3공화국은 5·16 군사쿠데타로 의원내각제였던 제2공화국을 폐기시킨 반헌법적 출범이었다. 제3공화국 당시의 5차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 번의 임기를 더 하기 위한 3선 개헌이었고, 후일 제5공화국 때문에 제4공화국으로 명명되고 있는 유신체제의 유신헌법은 장기집권을 위한 친위쿠데타적 헌법개정이었다. 제5공화국 또한 절차적으로는 무척 합법적으로 진행하는 척 했지만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데 있어서 비민주적이었기에 쿠데타의 산물로 보고 있다.

장기집권용 개헌과 현행 개헌시도
장기집권용 개헌과 현행 개헌시도

◇현행 헌법 개헌시도

돌이켜보면, 한국 헌법은 예기치 않게, 때로는 원치 않게 바뀌어 버리거나 쿠데타와 반란으로 공격당해 왔다. 현행 제9차 헌법은 군사정권 장기집권을 끊고자 나온 국민 항쟁의 산물이다.

87체제의 현행헌법은 장기집권을 끊는 데는 성공했으나 과잉 위임·집중된 대통령 권력의 통제를 놓쳐버린 5년 대통령단임제였다. 그로 인해 20년이 지난 2007년 1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의 연속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 주기와 맞춘 대통령 4년 연임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과오는 개헌실패였다. 4·19 혁명과 6·10 항쟁 이후 정치권은 어떻게든 진일보된 개헌, 즉 국민에게 다가가는 정치체제 변경의 결단을 해냈다. 촛불혁명의 힘을 개헌으로 연착륙시키지 못한 것은 시대적 사명을 방치·폐기한 것으로 다시금 그 불씨를 살려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최장집 교수류의 정당중심론으로는 볼 수 없는 직접민주주의적 전통이 있기에 제10차 개헌에서는 국민의 직접적 정치참여 채널을 장치할 때가 됐다. 국민소환·국민발안과 같은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추고, 4년연임 개헌으로 국민에게 대통령 선출권과 심판권을 온전히 돌려줘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지방분권에 대한 외면이 유신·제5공화국 헌법조문과 동일한 현행헌법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은 너무도 반민주적이고 반시대적이다.

◇개헌의 시기·방법·내용

윤석열의 파면과 12·3 내란재판이 헌정유린·반란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라면, 개헌은 새 시대의 개막이다. 2027년 내년은 큰 선거가 없고 내란재판과 청산을 매듭지을 수 있어서 이재명 정부가 개헌의 최적기로 삼을 만하다.

개헌 방법은 개헌안 제출권자인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국민참여개헌추진위원회'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업(協業)해 국민에게 올릴 최종 결재안을 만드는 것이다. 개헌안 공고·의결·투표 등의 형식적인 절차보다 국민·국회·정부 등 다각도의 의견 수렴과 구체적인 개헌안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개헌의 범위와 내용은 국민적 합의가 되어있는 사안과 토론이 필요한 사안을 세밀히 엄별해 순차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단계별로 구분해서 살핀다면 ①이미 합의된 것 ②합의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 ③합의가 가능한 것 ④합의를 위한 토론이 필요한 것으로 그 분류가 가능하다.

5·18의 헌법전문 수록은 이미 정치권은 물론 국민적 합의가 된 사항이다. 동시에, 대통령 4년연임 제도도 오랫동안 여야,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합의된 것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개헌 합의가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행정통합특별법 제정이 국회에서 의결되고 있는 것은 오랜 숙원사항 중 하나였던 지방분권의 헌법화에 실질적 합의를 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사법개혁 부문은 국민적 호응이 높지만 여야, 보수·진보진영 간의 토론과 협의가 필요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헌 사항에 포함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개헌은 대체적으로 위정자를 위한 역사였다. 국민을 위한 개헌을 한다면 무엇보다 한국 헌법 역사 변혁의 주체인 국민의 정치참여욕구를 제도화시킬 직접정치의 기제로서 국민소환·국민발안 도입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국민의 삶을 바꿀 개헌을 구상한다면, 대통령과 국회는 국민의 주거·의료·기본복지·저출생 등에 대한 국가적 의무를 명기하는 것까지도 개헌제출안의 중심에 둘 필요가 있겠다.

박상철 미국헌법학회 이사장
박상철 미국헌법학회 이사장

박상철 미국헌법학회 이사장 palma21@daum.net

〈필자〉국내 대표적 헌법학자로 현재 미국헌법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경기대 명예교수다. 국회입법조사처장,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과 국회혁신위원, 경기대 부총장과 정치전문대학원장을 지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I) 교환교수·UCI 민주주의연구소 초빙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정치·사회 혁신을 위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