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의료데이터 표준화로 'AI 고속도로' 잇는다

유럽 대륙을 열차로 횡단하는 여행객들은 종종 국경을 넘을 때 예상치 못한 불편을 겪는다. 긴 대기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나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하기도 한다. 바로 '궤간(선로 폭)'의 차이 때문이다.

서유럽 대부분 국가는 표준궤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이나 일부 동유럽 국가는 더 넓은 궤간(광궤)을 사용한다. 이 차이로 인해 열차는 국경을 그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승객은 플랫폼에서 내려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화물의 경우에는 더 복잡하다. 짐을 일일이 옮겨 싣거나 바퀴를 교체하는 작업까지 필요하다.

병원을 옮겨다니는 환자들도 비슷한 불편을 겪는다. 병원마다 사용하는 데이터 형식과 용어, 시스템이 제각각이면 환자는 병원을 옮길 때마다 챙겨야 하는 서류가 많아진다. 최악의 경우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마치 국경마다 열차를 갈아타야 하는 상황과 같다.

의료데이터 표준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공통 선로'다. 동일한 규격과 언어로 데이터를 기록하고 교환하면 병원 간 정보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환자의 안전과 의료의 질, 나아가 국가 의료 경쟁력까지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다.

(자료=한국보건의료정보원)
(자료=한국보건의료정보원)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 과정은 어떤 물건들을 택배로 보내는 과정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먼저, 물건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같은 물건이라도 판매자마다 '사과' 'apple'처럼 이름을 다르게 붙이면 받는 사람은 혼란이 생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SNOMED CT(용어 표준)와 같은 표준용어체계다. 즉 '감기'든 '고뿔'이든 하나의 코드로 통일하는 것이다.

다음은 택배 상자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물건 목록을 정하는 것이다. 의료 데이터 교류에도 환자정보, 의료기관 정보, 약물 정보 등 반드시 필요한 필수 항목들이 있다. 이것을 정의한 것이 바로 핵심교류데이터(KR CDI)다.

이렇게 정해진 물건은 어떤 상자에 담고, 송장을 어디에 붙일지 통일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상자 크기와 송장이 붙은 위치가 제각각이라면 물류창고에서 택배를 분류하는 작업이 오래 걸릴 것이다.

의료데이터도 전송 항목과 구조를 통일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한데 이를 핵심교류데이터 전송표준(KR Core)이라 부른다. 결국 표준화란 '당일 택배'처럼 의료정보를 빠르게 교류하고 활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전 세계는 이미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SNOMED CT, DICOM(의료영상 표준), FHIR(전송 표준) 같은 국제 표준을 중심으로 의료정보 교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헬스케어와 인공지능(AI) 발전에 따라 서로 다른 기관 간 데이터 공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국가 간 의료데이터 교환을 위해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민 단위의 의료데이터 통합을 실현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사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데이터가 연결되지 않으면 AI도, 정밀의료도, 글로벌 협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에서 가장 앞선 국가로 평가된다. 미국은 일찍부터 FHIR을 중심으로 의료데이터 교류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이 강력하다. '21세기 치료법' 등을 통해 환자 의료데이터 접근권과 전송권을 법적으로 보장했다. 또 전자의무기록(EHR) 시스템 인증 기준을 통해 표준 준수를 의무화하고 의료기관 간 정보 교환을 촉진했다.

그 결과 환자는 병원을 옮겨도 자신의 의료기록을 쉽게 공유할 수 있으며, 연구자들은 표준화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디지털 헬스케어와 의료 AI 분야에서 선도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국가 차원의 표준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있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의료데이터 표준화를 위해 한국 핵심교류데이터(KR CDI)와 한국 핵심교류데이터 전송 표준(KR Core)을 개발·보급하고 있다.

또 SNOMED CT 국가관리센터(NRC) 운영, WHO-FIC 한국협력센터 운영, GDHP 활동 등 국제 협력을 통해 최신의 국제표준 동향을 선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한국 핵심교류데이터(KR CDI) 개발 과정 (자료=한국보건의료정보원)
한국 핵심교류데이터(KR CDI) 개발 과정 (자료=한국보건의료정보원)

최근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이 추진하고 있는 AI 상호운용성 연구개발(R&D) 사업은 철도의 '자동 궤간 변경 시스템'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서로 다른 선로 규격에서도 열차 바퀴 간격을 자동으로 조정해 환승 없이 이동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AI 상호운용성 기술은 서로 다른 데이터 구조와 시스템을 가진 병원 간에도 데이터를 AI가 자동으로 변환·연결해준다.

데이터 표준화는 의료기관 간 정보 교류뿐 아니라 의료 AI 학습 데이터 확보와 다기관 연구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형태의 데이터를 동일한 구조로 변환하는 CDM(공통데이터모델)을 활용하면 동일한 분석 규칙을 적용할 수 있어 다기관·대규모 연구가 가능해진다. 데이터를 외부로 반출하지 않고도 각 기관에서 데이터 분석 후 결과만 취합하는 방식의 연구가 가능해 개인정보보호에도 효과적이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은 2020년부터 데이터 중심병원 지원사업을 통해 43개 병원에 CDM 기반의 데이터 구축과 활용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 K큐어 플랫폼과 보건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역시 CDM 방식으로 연구자들이 공공 데이터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보건의료 데이터 표준화는 단순한 기술 과제가 아니다. 이는 환자의 생명을 지키고, 의료의 질을 높이며, AI 활용을 촉진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다.

표준화가 이뤄지면 환자는 병원을 옮겨도 진료가 끊기지 않고, 의료진은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연구자는 더 빠르게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철도 선로의 궤간이 하나로 통일될 때 열차가 끊김 없이 달릴 수 있듯, 의료 데이터가 표준화될 때 비로소 미래 의료의 길이 열린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와 실행이다. 데이터가 흐르는 길을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 혁신의 출발점이다.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염민섭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

〈필자〉39회 행정고시를 거쳐 공직에 입문했다.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건강정책관, 장애인정책국장, 노인정책관 등 주요 보직을 거쳤다. 2024년 7월 한국보건의료정보원장으로 임명됐으며 보건의료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데이터 표준화와 안전한 활용 기반으로 의료 서비스 질 향상과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