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혁신의기술] 〈51〉AI의 속도, 기술의 '가속'보다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자세'(하)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

도시계획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일찍이 '도시는 함께 사는 기술의 결정체'라고 말했다. 지난 칼럼에서 개인의 자세와 조직의 구조를 살펴봤다면, 이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생태계로 시선을 돌릴 차례다. 개인이 바뀌고 조직이 달라지더라도, 그것이 뿌리내릴 토양인 사회의 구조가 그대로라면 혁신은 언제나 모래 위의 건축에 머물고 만다.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이 생태계의 순환 속도를 전례 없이 높이고 있다. 스마트 도시는 교통과 에너지, 범죄 패턴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하지만,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합의하는 속도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다. 누가,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그 알고리즘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가. 효율적인 도시가 곧 살기 좋은 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효율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는 바로 이 간극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핵심이 사회적 신뢰의 설계다. 유럽연합(EU) AI법을 둘러싼 논쟁의 근저에는 더 본질적인 물음이 있다. '기술의 속도를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가.' 뉴욕시가 채용 과정에서 AI 도구를 활용하는 기업에 알고리즘 감사를 의무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을 막는 조치가 아니라, 시민이 AI를 신뢰하고 함께 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기술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달릴 수 있는 속도를 만드는 것. 이것이 AI 시대, 새로운 사회 계약의 핵심이다.

그 사회 계약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은 구성원들의 집단적 역량이다. 흔히 'AI 리터러시'라 부르지만, 그 본질은 기술 사용법의 습득이 아니다. △기술의 판단 근거를 묻고 △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함께 더 나은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최근 핀란드가 실제 사회 현상을 여러 교과가 함께 탐구하는 '현상 기반 학습'으로 전환한 것, 싱가포르가 AI 사용법보다 'AI의 한계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에 방점을 찍은 것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교육은 도시라는 공동의 삶터를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는 사회적 합의의 능력을, 다음 세대와 함께 키워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 교육은 신뢰의 기반 시설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진정한 신뢰는 기술을 설계하는 기업, 이를 활용하는 조직, 규칙을 만드는 정부, 결과를 살아내는 시민이 투명한 대화를 나눌 때 비로소 세워진다. '투명성을 조직의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것'이 조직 거버넌스의 원칙이라면, 사회 차원에서는 '합의를 삶의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칙이다.

돌이켜보면, 기술의 대전환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재설계를 요구해 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책을 복제하는 기계가 아니라, 지식의 독점을 해체하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인쇄기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사회에 만들어 낸 '질문할 권리'의 확산이었다. AI도 다르지 않다. AI가 인류에게 선물한 가장 귀한 것은 정교한 답이 아니라, 그 답을 받아든 인간이 비로소 더 깊고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상) 편에서 제시한 '비효율의 가치'는 개인에게' 여백의 시간'으로, 조직에 '여백의 설계'로, 사회에게는' 여백의 문화'로 번역된다. 모든 것을 최적화하고 모든 시간을 생산성으로 채우려는 충동에 맞서, 의도적으로 느리게 생각하고 깊이 공감하며 함께 상상하는 문화. 그것이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AI의 시대일수록 더 간절히 필요해지는 인간 고유의 자산이다.

결국 혁신의 기술은 AI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AI의 시대에 인간답게 사는 기술, 즉 묻고, 의심하고, 공감하고, 합의하는 기술이다. 그것이 개인에게는 '자세'가 되고, 조직에는 '문화'가 되며, 사회 전체에게는 '지속 가능한 삶의 생태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혁신의 기술'이다.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