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한 알의 약 뒤에 서 있는 사람
나는 약학과 지원자의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를 펼칠 때마다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환자가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와 종이 한 장을 내민다. 그 위에 적힌 글자는 환자에게 외국어이지만 약사에게는 한 사람의 병력이자 삶의 일부다. 약사는 그것을 읽어내고, 한 알의 알약 안에 정확한 분자량과 용해도, 그리고 그 사람의 신장 기능까지를 함께 담아 건넨다. 말하자면 약사는, 한 알의 약 뒤에 서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대학은 약을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라, 약을 다룰 준비가 된 탐구자를 선발한다.
2. '이과 우등생'이라는 착각
약학과 지망생의 생기부에서 흔히 반복되는 모습이 있다. 화학·생명과학 성적이 우수하고, 약사 직업 탐방을 다녀왔고, 신약 개발 도서 한두 권을 읽었다는 식의 기록이다.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런 활동만으로는 약학과가 보고 싶어 하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약학은 “신약을 만드는 창약(創藥), 약을 생산하는 제약(製藥), 환자에게 적용하는 용약(用藥)”이라는 세 축으로 구성되며, 이를 위해 생약학·약리학·생화학·분자생물학·미생물학·면역학·독성학·임상약학 등을 모두 다룬다. 따라서 생기부에는 단일 교과 성적의 우수성보다 '과목과 과목 사이를 잇는 융합의 흔적'이 더 중요하다.
3. 약학도로 진화한 3년의 서사
① 1학년, 호기심을 학문의 언어로 바꾸기
“과학수학 올인원 동아리 활동에서 사회 현상에 대한 과학적 토론을 주도하며, 남향의 집이 인기 있는 이유를 탐구하고,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자소엽차의 pH 농도 영향을 실험하는 등 과학적 접근 방식을 통해 문제 해결 능력을 신장시킴.”
주목할 점은 이 학생이 “약사 직업 탐구”를 곧장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흩어진 현상을 화학적 시선으로 다시 보았다는 사실이다. 자소엽차의 색 변화는 안토시아닌 색소와 pH의 관계로 설명되고, 이는 약물의 안정성과 흡수율 문제와 곧장 연결된다. 1학년에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의 결을 만드는 일'이다.
![[에듀플러스][박건영의 셀프 입시]⑩약학으로 가는 생기부](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06/04/news-p.v1.20260604.3132e95e564548d19b8acefd58cd3fb9_P1.png)
② 2학년, 교과와 교과를 잇는 융합의 시기
약학은 단일 학문이 아니다. 2학년의 생기부에서 빛나는 것은 단일 교과의 우수성이 아니라, 교과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기주도적 탐구다.
“화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심이 남달라 1학기에는 희소 금속에 대하여, 2학기에는 친구들과 함께 자율적으로 탐구 동아리를 결성하여 안토시아닌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연구하여 탐구보고서를 작성하는 열정을 보임.”
한편 이런 도구적 사고가 곧 약학과가 원하는 융합형 탐구의 원형이다. 약학에서 약물 동태를 이해하려면 미적분이 필요하고, 임상 자료를 해석하려면 통계가 필요하며, 약물 작용 부위를 추적하려면 생명과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성균관대 약학과 교과과정 로드맵에서도 잘 드러난다. 3학년에 약품분석학·생약학·물리약학을 배우고, 4학년에 약리학·면역학·예방약학을 거쳐 5학년 약학실습과 의약통계학으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철저한 교과 융합의 누적이다.
③ 3학년 원포인트 컨설팅, 약대 지망생이 흔히 마주치는 고민
현장 상담에서 가장 자주 듣는 약대 관련 고민은 세 가지다.
Q1. “수학·과학을 강화하다 보니 사회 과목 깊이가 약합니다.”
약학은 사회약학·약물경제학·보건정책까지 다루는 학문이다. 사회 과목을 모두 이수할 수 없다면, 독서·진로활동·세특에서 “약가 결정 구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 등재 절차”, “OECD 의약품 정책 비교” 같은 주제를 짧게라도 짚어두자. 빠진 과목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약학이 사회과학과 만나는 지점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Q2. “생명과학Ⅱ, 화학Ⅱ를 다 들어야 하나요?”
가능하면 그렇다. 다만 학교 사정상 불가능한 경우, 화학Ⅱ 핵심 단원(산·염기, 화학 평형, 산화·환원)에 해당하는 탐구를 세특이나 진로활동에서 자기주도로 보완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약학과의 의약화학·약품분석학이 사실상 화학Ⅱ의 확장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Q3. “약대는 의대처럼 수능 최저가 매우 높지 않나요?”
맞다. 학생부 전형이라 하더라도, 의약학 계열은 '수능최저학력기준' 을 매우 까다롭게 적용하는 대학이 많다. 「2027 대입정보 자료집」을 보면 가톨릭대 약학과의 경우 최저 충족률이 37.8%에 불과해, 표면 경쟁률 18.5:1이 실질 경쟁률 2.00:1까지 떨어진 사례가 있다. 즉 약대 입시의 마지막 승부는 “끝까지 수능을 놓지 않는 수시 전략”에서 갈린다.
4. 결론, 한 알의 신뢰를 짓는 3년
한 알의 신뢰를 짓는 6년이 시작되는 그 자리는, 결국 여러분의 고등학교 3년이라는 작은 실험실이다. 오늘의 작은 탐구 하나를 가볍게 넘기지 말고, 끝까지 파고들어 보자. 그 집요한 탐구의 습관이, 언젠가 환자의 손에 닿을 한 알의 약을 만드는 손끝의 정확성을 길러줄 것이다.
이지희 기자 eas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