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이란이 오는 19일 스위스에서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에 공식 합의하면서 호르무즈 해협도 재개방 될 것으로 보인다.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위협하던 국제유가도 80달러 초반대로 급락했다. 전쟁 발발 직후 수입 원유의 70%를 의존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품귀 등 극심한 공급망 교란을 겪었던 우리 경제도 회복세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번 MOU가 중동 전역의 총성을 멈추고 공급망을 복원하는 거대한 경제적 낙수효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란이 공개한 세부 조항을 들여다보면 핵심 쟁점의 유예와 미국과 이란의 동상이몽식 해석 차이라는 시한폭탄을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MOU 초안 두고 신경전
14일(현지시간) 이란의 반관영 매체인 메르통신에 따르면 MOU 초안은 총 14개 항목으로 구성됐다. 이는 이란 협상팀 수석대표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국회의장의 전략고문인 메흐디 모하마디를 통해 공개됐다.
눈에 띄는 대목은 합의문을 둘러싼 양국의 시각차다. 공식 문서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틈을 타, 양국 지도부가 철저하게 자국 강경파를 달래기 위한 '정치용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료 없는 전면 개방(Toll-free)'을 승인했다”며 과거 정부와 달리 이란에 수천억달러를 주지 않고도 비핵화 장벽을 세웠다고 공언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안정시킨 강력한 협상가로서의 이미지를 과시한 것이다.
반면 이란이 공개한 14개항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란은 안전 및 항행 서비스 명목의 호르무즈 해협 수수료 징수 권한이 전적으로 이란과 오만에 있으며 이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물질적 보상 부문에서도 미국의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초안에는 전쟁 피해 복구를 명분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3000억달러(약 455조원) 규모의 '개발 및 재건 기금' 조성이 명시됐다. 이란은 이를 사실상 미국의 전쟁 보상금 지급으로 해석하며, 약 240억달러 규모의 이란 동결 자금 절반도 합의 이행 초기에 즉각 해제된다고 주장했다.
안보 측면의 간극도 크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합의 이행을 보증하는 사상 첫 '대리 보증' 체계와 30일 이내 미군 철수 서면 약속을 받아냈다는 것이 이란의 설명이다. 하지만 서방이 핵심 위협으로 간주해 온 이란의 탄도미사일과 역내 대리세력 지원 문제는 의제에서 아예 빠졌고, 핵 프로그램 제재 역시 60% 고농축 우라늄의 단순 '희석' 조치로 한정됐다.
특히 이번 합의는 갈등의 불씨를 향후 60일간의 2단계 협상으로 미뤄둔 '미완'이라는 한계도 갖고 있다. 이란은 미국이 해상 봉쇄를 풀고 자산을 방출하는지 지켜본 뒤 다음 단계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유가는 80달러대로 급락
그럼에도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8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4.00% 내린 배럴당 83.84달러를 기록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역시 4.55% 하락한 81.02달러에 거래됐다. 시장 공급 우려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인 브렌트유 근월물과 차근월물 간 가격 차이는 지난 4월 배럴당 12달러 이상에서 현재 약 1달러 수준으로 좁혀져 공급 불안이 사실상 해소됐음을 보여줬다. 유럽 천연가스 선물 가격도 5.8% 급락하는 등 원자재 시장 전반이 하향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봉쇄 기간 해협 안쪽에 갇혀 있던 원유와 정제유 약 6000만배럴이 반출되고, 역내 산유국들이 하루 최대 1100만배럴에 달하는 생산량을 차례대로 복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추가 하락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전쟁 이전의 균형을 되찾기까지는 최소 60일에서 90일이 걸릴 것이라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이란이 해협 내에 살포했다고 주장하는 기뢰의 탐지 및 제거 작업에 기술적·물리적 시간이 소요되는 데다, 중동에서 아시아 수요처까지의 항행 거리에만 3주 이상이 걸려 시장에 즉각적인 물량이 쏟아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전쟁 중 가동을 멈춘 유전과 LNG 수출 터미널 등 복잡한 정제 시설의 재가동을 위한 기술적 복구 작업에도 수개월이 소요될 전망이다.
◇韓, 석유최고가격제도 종료 수순
전쟁 직후 호르무즈 봉쇄 조치로 원유 공급 차질과 석유화학 기본 원료인 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렸던 우리나라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산업통상부가 수입선 다변화 정책에 속도를 내면서 공급망 위기설은 가라앉았지만, 전쟁에 따른 불확실성에 국민의 일상까지 흔들리는 위기를 겪었다.
산업부는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더라도 당장 급격한 원유 도입 체계의 변화보다는 현재의 다변화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유지하며 안정성을 검증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3월 도입 이후 3개월 넘게 시행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 종료 시점도 주목된다. 산업부는 앞서 종료 시점을 종전 이후, 해협 개방 이후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MOU 서명 이후 실제 종전 단계 이행 여부와 국내 물가 등에 미칠 충격을 고려해 '점진적 폐지'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최고가격제를 통해 억눌러왔던 누적 인상 억제분이 한꺼번에 시장에 전가되면, 서민 물가에 2차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는 18일 발표될 제7차 석유 최고가격 고시도 현행 수준을 유지해 물가 방어막 역할을 지속하게 한 뒤, 시장 유가의 안정화 징후를 살피며 단계적으로 해제될 것으로 전망된다.
안영국 기자 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