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됐던 여성 루스 엘리스가 사후 70여 년 만에 조건부 사면을 받았다고 8일(현지시간) BBC 방송이 보도했다.
데이비드 램미 영국 부총리는 국왕의 승인을 거쳐 엘리스에 대한 사후 조건부 사면이 단행됐으며, 기존의 사형 판결이 종신형으로 대체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램미 부총리는 “이번 사면이 엘리스의 살인 혐의 자체를 무죄로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건에 있었던 심각한 불의를 인정해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스는 지난 1955년 연인이던 데이비드 블레이클리를 총으로 쏴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런던 홀로웨이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엘리스의 유족과 지지자들은 엘리스가 블레이클리로부터 지속적인 신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한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범행 10일 전에는 폭행을 당해 유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재판부는 배심원단에게 연인의 학대를 감형이나 변호의 근거로 삼지 말라고 지시했다. 엘리스가 재판 과정에서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자, 배심원단은 단 14분 만에 유죄 평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영국 사법 체계에 '심신미약' 감경 규정이 도입되기 2년 전에 발생했다.
엘리스의 손주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명예 회복과 사면을 위해 캠페인을 벌여왔다. 엘리스의 손녀 로라 엔스턴은 사면 소식을 반기며 “할머니의 처형이라는 그림자가 두 세대에 걸쳐 드리워져 있었고 우리는 죄 없이 수치심을 안고 살아왔다”며, “70년 만에 마침내 정의가 실현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엔스턴은 “오늘날의 사법 시스템은 가정폭력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와 학대의 영향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측 장관과 변호인단 역시 이번 결정을 환영하며, 여성과 소녀를 향한 폭력 근절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엘리스의 처형은 영국의 사형 제도가 폐지되는 데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이다. 20대 미혼모인 엘리스가 잔혹한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재판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형 집행 전 교도소 앞에서는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구명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 사형 제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급물살을 탔고, 10년 뒤인 1965년 영국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형이 사실상 폐지됐다.
서희원 기자 shw@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