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 한국 반도체, 유럽을 다시 생각할 때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치열한 경쟁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차세대 메모리와 첨단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6월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9.5% 증가한 448억2000만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반도체 수출이 월 400억달러를 돌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 산업의 역사는 오늘의 시장 지배력이 내일의 경쟁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없이 보여줬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새로운 성장 동력에 대한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듯이, 반도체 산업 역시 현재의 성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AI 메모리와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당분간 한국 반도체 산업의 핵심 성장 동력이겠지만, 장기적인 경쟁력을 위해서는 AI 인프라 구축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장 기반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과제는 시장 지배력을 보다 폭넓은 생태계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애플리케이션 특화 반도체, 자동차·산업용 반도체, 첨단 패키징, 파운드리 협력, 신뢰할 수 있는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 포함된다. 특히 미국과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고려할 때 한국 기업들은 유럽 시장 자체보다 연구개발 협력, 공동 개발, 고객 확보, 기술지원 등 유럽 산업 생태계와의 전략적 연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유럽은 시장 규모에서는 미국이나 중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자동차, 산업 자동화, 전력반도체, 첨단 제조 장비 산업이 가장 밀집한 지역이다. AI가 물리적 산업 시스템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이러한 분야는 차세대 비메모리 반도체 수요와 산업 표준이 형성되는 핵심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 산업 생태계는 한국 기업들이 설계 역량과 시스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구축할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유럽의 정책 환경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기존 반도체법(Chips Act)에 이어 '기술 주권 패키지(Tech Sovereignty Package)'와 이른바 '반도체법 2.0'을 추진하며 공급망 자립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공급망뿐 아니라 연구개발 협력과 산업 표준 형성 측면에서도 새로운 협력 기회를 만들고 있다.

특히 자동차와 산업용 기계가 소프트웨어(SW) 중심의 고도화된 센서 기반 플랫폼으로 진화하면서 반도체는 더 이상 단순한 범용 부품이 아니다. 이제 반도체는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복잡하고 안전이 중요한 시스템에 설계 단계부터 통합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유럽이 제공하는 전략적 기회는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형 반도체 기업에는 현지 생산시설 투자보다 고객 확보, 공동 개발, 연구개발 및 파운드리 협력을 통해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중소·중견 기업에는 유럽 고객과의 협력이 기술력과 운영 역량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넘어야 할 장벽도 있다. 유럽 고객들은 기능 안전성, 사이버보안, 신뢰성 검증, 기술 문서 관리 등 매우 엄격한 기준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단순 공급업체를 넘어 제품 개발 단계부터 함께하는 공동 개발 파트너로 접근해야 하며, 탄소배출 데이터와 공급망 추적 등 지속가능성 요구에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회의 창이 영원히 열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럽 산업 생태계와의 협력과 고객 기반 확대를 미룰 경우 차세대 자동차 및 산업 플랫폼 생태계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될 위험이 있다. 현재의 AI 메모리 경쟁력을 발판으로 유럽 산업 생태계와의 전략적 연계를 확대한다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현재의 강점을 보다 지속 가능하고 견고한 글로벌 경쟁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퍼 스테니우스 레달(Reddal) 창립자 겸 CEO per.stenius@reddal.com

퍼 스테니우스 레달(Reddal) 창립자 겸 CEO
퍼 스테니우스 레달(Reddal) 창립자 겸 C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