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신용에도 사다리가 필요하다

길재식 디지털금융부 부국장
길재식 디지털금융부 부국장

금융은 흔히 신용을 바탕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신용이 있어야 금융을 이용할 수 있고, 금융을 이용해야 신용이 쌓인다.

이 단순한 명제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 금융거래 이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대출이 거절되고, 대출을 받지 못해 다시 신용을 쌓을 기회를 잃는 악순환. 이른바 '씬파일러(Thin Filer)'가 겪는 현실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이 통신요금 납부, 공공정보, 생활·행동 데이터를 활용한 대안 신용평가(CB) 체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이런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금융 문턱을 무조건 낮추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평가방식이 보지 못했던 가능성을 새롭게 평가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현재의 신용평가 시스템은 과거의 금융거래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취업을 막 시작한 청년이 신용카드 사용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자녀를 키우느라 경제활동을 쉬었던 주부 역시 안정적인 가계 운영 능력이 있음에도 금융 기록이 부족해 낮은 평가를 받는다. 은퇴 이후 연금과 자산을 보유한 고령층도 금융활동이 줄었다는 이유로 신용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대안 CB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통신요금을 연체 없이 납부했는지, 공공요금을 성실히 냈는지, 생활 속에서 얼마나 안정적인 소비와 거래를 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데이터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더욱 긍정적인 부분은 이번 제도가 단순히 대출 승인 숫자를 늘리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짜 핵심은 '신용 사다리'를 만드는 데 있다.

물론 기대만큼 우려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대안 정보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신요금을 성실히 납부했다고 대출을 잘 갚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생활 데이터 역시 개인의 경제적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다양한 데이터를 충분히 검증하고 실제 상환 성과와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통신 정보와 생활 데이터를 활용하는 만큼 정보 수집 범위와 이용 목적은 명확해야 하며, 이용자의 동의 절차 역시 투명해야 한다. 신용평가의 혁신이 개인정보 침해 논란으로 이어진다면 제도의 신뢰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평가 알고리즘의 투명성도 과제다. AI와 빅데이터 기반 신용평가가 확대될수록 소비자는 왜 대출이 승인됐는지, 또는 거절됐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금융은 신뢰 산업이다. 결과뿐 아니라 평가 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확보해야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도덕적 해이를 막는 장치도 필요하다. 포용금융은 누구에게나 쉽게 돈을 빌려주는 정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환 능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위험관리를 병행해야 한다. 포용과 건전성은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다.

길재식 기자 osolgil@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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