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국내 벤처투자가 역대 최대인 8조8676억원을 기록한 배경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의 모험자본이 빠르게 유입됐고, 주요 투자처는 인공지능(AI)·반도체·로보틱스 등 딥테크 기업으로 이동했다. 업력 3년 이하 초기기업과 비수도권까지 투자 온기가 확산됐다는 점도 특징이다.
다만 투자금이 일부 딥테크 기업에 집중되는 '양극화'는 새로운 숙제로 떠올랐다. 게임 분야 투자는 유일하게 감소했고, 벤처캐피털(VC) 업계에서는 투자 확대 속도를 코스닥 등 회수시장이 따라가지 못하면 향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정책금융 출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3%, 민간 부문은 28.1% 증가했다. 전체 벤처펀드 출자금 가운데 민간자금 비중은 80%를 웃돈다.
특히 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 출자액은 2조606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4.9% 급증했다. 중기부는 금융기관의 벤처펀드 출자에 적용되는 위험가중치(RW) 완화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책 목적 벤처펀드의 위험가중치가 기존 400%에서 100%로 낮아지면서 금융회사의 자본 부담이 줄었다.

◇플랫폼에서 AI·반도체로…투자 주력 산업 변화
투자가 향하는 산업도 달라지고 있다. 업종별로 ICT서비스가 1조8600억원으로 전체의 21.0%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전기·기계·장비 1조5359억원(17.3%), 바이오·의료 1조5041억원(17.0%) 순이었다. 증가율로는 ICT제조가 전년 동기 대비 143.3% 늘어 가장 높았다. 전기·기계·장비도 90.4%, ICT서비스 62.2%, 바이오·의료 53.6% 증가했다.
벤처 호황기였던 2021~2022년 플랫폼과 기업·소비자간거래(B2C) 서비스 기업이 투자시장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AI 솔루션과 AI 반도체, 메모리칩, 휴머노이드 등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로보틱스 분야에서 대형 투자가 잇따르면서 ICT제조와 전기·기계·장비 투자 증가를 견인했다.

올해는 초기기업 투자도 크게 늘었다. 그동안 벤처시장에서는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실적과 사업모델이 검증된 후기기업에 투자가 집중되는 '투자 보수화'가 나타났으나 올해는 완화됐다는 평가다. 업력 3년 이하 기업 투자액은 1조828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6.4% 증가했고 투자받은 기업 수도 499개에서 643개로 28.9% 늘었다.
다만 초기기업 전반에 투자가 고르게 확산됐다기보다 딥테크 기업이 창업 초기부터 대규모 자금을 유치하는 새로운 투자 흐름의 영향이 컸다. 벤처투자회사·조합 기준 상반기 100억원 이상을 유치한 업력 3년 이하 기업은 16개사로 총 4218억원을 조달했다. 이 가운데 AI·로보틱스 기업 9개사가 3153억원을 차지했다.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초기기업 투자는 회수까지 시간이 길고 난도가 높아 VC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영역”이라면서도 “정책적 지원과 AI 중심 산업 변화가 맞물리며 초기기업 투자가 증가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 투자도 확대됐다. 벤처투자회사·조합 기준 비수도권 투자액은 1조64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4.7% 증가해 수도권 증가율 49.9%의 두 배를 웃돌았다. 중기부가 최근 3년간 벤처투자 유치 기업을 분석한 결과 투자 이후 고용도 매년 11% 이상 증가했고, 신규 고용 중 30대 이하 청년 비중은 약 60%에 달했다.
◇게임만 투자 감소…“대형 딜·창업 모두 줄어”
대부분 업종에서 투자가 늘었지만 게임은 예외였다. 중기부는 지난해와 달리 올해 상반기 게임 분야에서 수백억원 규모 대형 투자 사례가 사라졌고, 신규 창업 자체도 줄어든 점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창업자와 투자자의 관심이 AI, 로봇 등 신산업으로 이동한 영향도 있다는 분석이다.
윤 대표는 “대형 게임은 기존 상장 대형사 위주로 개발되고 있고, 작은 게임은 AI가 활성화되면서 과거보다 훨씬 적은 인원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며 “벤처투자 시장에서 게임 투자가 다시 크게 늘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체 투자 규모가 커지는 가운데 업종별 온도 차이도 커지고 있다. 딥테크 기업은 매출이나 이익이 부족해도 기술력과 글로벌 성장성을 기반으로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는 반면 비딥테크 기업은 사업모델과 손익, 상장 가능성까지 보다 엄격한 검증을 받고 있다는 게 VC업계 설명이다.

◇투자는 늘지만 출구는 좁아…“회수시장 뒷받침돼야”
VC업계는 펀드 결성과 투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과 달리 투자금을 회수할 코스닥 기업공개(IPO) 시장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김대현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딥테크 특정 기업으로 자금이 몰리며 밸류에이션이 과도하게 높아지는 것이 걱정된다”며 “투자가 지속되려면 결국 엑시트가 이뤄져야 하는 만큼 AI 기업 상장 기준이나 중복상장 이슈 등 IPO 관련 불확실성이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표도 최근 코스닥 신규 상장기업 상당수가 낮은 시가총액에 머물고 상장 이후 공모가를 밑도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들며 “이를 해결하지 않은 채 투자금만 빠르게 늘어나면 향후 버블을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인수합병(M&A)과 세컨더리 등 IPO 이외 회수경로 확대도 과제로 떠올랐다. 중기부는 M&A·세컨더리 펀드를 지속적으로 조성하고 기업승계형 M&A, 초기 지역기업 투자지분 회수 등 민간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자금이 부족한 영역을 중심으로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