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산업의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발전 속도는 빨라지고, 기술은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산업 주도권과 국가 성장 경로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됐다. 오랜 기간 축적한 제조 역량이 여전히 중요한 경쟁력인 가운데, 새로운 기술에서 출발한 기업이 기존 산업의 경쟁 방식을 바꾸고 전에 없던 시장을 만드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경제데이터베이스 수록 자료에 따르면 1975년만 해도 미국과 유럽의 국내총생산(GDP)은 각각 약 1조7000억달러로 사실상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 오늘날, 미국은 유럽을 큰 격차로 앞서 나가고 있다.
이런 변화는 미국과 유럽의 기업구조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시가총액 100억달러 이상 기업을 비교한 자료를 보면, 설립 50년 미만 기업의 시가총액은 미국이 42조9000억달러인 반면 EU는 5조달러에 불과하다. IMF는 미국과의 생산성 격차가 확대된 배경으로 유럽기업이 충분한 규모로 성장하기 어려운 '스케일업(Scale-up)'의 제약을 짚었다.

결국 국가 경제의 성패는 얼마나 우수하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이들을 글로벌 규모로 스케일업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엔비디아, 구글, 테슬라처럼 혁신적인 기술에서 출발한 신생 기업들은 기존 강자들을 제치고 세계 시장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이들의 등장은 개별 기업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시장의 경쟁 질서를 재편하며 국가 경제의 새로운 성장축을 형성했다.
◇대덕특구, 다양한 딥테크가 기업으로 태어나는 혁신의 요람
우리에게도 이런 씨앗은 축적돼 있다. 대표적인 곳이 대덕연구개발특구다. 대덕특구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을 중심으로 우주·항공, 첨단바이오, 반도체, AI, 로봇, 국방 연계 기술 등 다양한 딥테크 연구 역량이 집적돼 있으며,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술 이전과 창업, 투자와 성장으로 이어주는 혁신 생태계도 오랜 시간 함께 형성돼 왔다.
그 결실은 자본시장에서 입증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대덕특구 코스닥 상장기업은 64개로, 2005년 14개에서 20년 만에 크게 늘었다. 이 가운데 코스닥 시가총액 1위인 알테오젠을 포함해 레인보우로보틱스,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 펩트론 4개 기업은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고, 이들의 시가총액만 합쳐도 약 45조원에 이른다. 여기에 대덕특구 내 연구소·공장을 보유한 기업, 출연연 기술을 이전받아 성장한 기업, 대덕특구 출신 창업자까지 포함하면 7개 기업이 특구를 기반으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연구개발특구 전체로 보면 2024년 말 기준 기업 1만5671개, 매출 85조9000억원, 고용 35만명 규모로 성장했고, 연구소기업은 올해 9월 말 기준 누적 2339개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과의 바탕에는 우수한 연구 성과와 기업, 투자와 시장을 잇는 연결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TIP 총회에서 연구개발특구의 '프런티어 기술 생태계(Frontier Technology Ecosystem)' 모델이 각국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가가치가 높은 딥테크 기반 제조 기업이 더 많이 나오는 경제로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딥테크의 경쟁력은 기술 난도에만 있지 않다. 하나의 원천기술이 여러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고, 같은 산업 안에서도 기술과 수요가 결합하며 새로운 시장 세그먼트(Segment)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도체만 보더라도 차세대 메모리, 온디바이스·온센서 AI 반도체, AI 서버용 반도체, 전력 반도체, 국방 반도체 등 서로 다른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바이오 분야에서도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신약 플랫폼과 진단, 의료기기, 바이오소재 등 다양한 시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이 지향할 성장 모델도 이와 맞닿아 있다. 강한 제조업 기반에 축적된 과학기술을 결합해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기반 제조 기업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원천기술이 제품과 공정, 부품과 소재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연구실의 기술이 실증과 양산을 거쳐 시장을 만날 때 과학기술의 가치도 산업의 부가가치로 전환된다. 기술의 다양성이 기업의 다양성으로, 다시 산업의 다양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2의 반도체' 하나보다 여러 개의 성장축이 필요하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할 점이 있다. 새로운 성장 역시 어느 한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방식이어서는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는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주력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여왔다. 이 강점은 앞으로도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나 특정 산업의 성과가 경제 전체를 끌어올리는 힘이 큰 만큼 세계 수요와 공급망, 산업 사이클이 바뀔 때 그 충격도 커질 수 있다.
기술과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앞으로 10년, 20년의 성장을 어떤 산업이 이끌 것인지 지금 정확히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런 만큼 '제2의 반도체'라는 하나의 산업을 찾아내는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 균형은 모든 산업을 같은 크기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한 주력산업 경쟁력은 더 높이면서, 그 옆에서 제2·제3 성장축이 여러 분야에서 계속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를 떠받칠 힘이 여러 곳에서 만들어질 때 산업구조도 더 넓고 지속 가능해진다.
◇3대 메가프로젝트와 7대 SEED, 집중과 다양성이 함께 가야 한다
올해 발표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와 '미래성장동력 7대 SEED'를 함께 살펴볼 이유도 여기에 있다.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에 국가와 민간의 역량을 대규모로 결집하는 전략이다. 산업적 파급력이 크고 글로벌 경쟁의 속도가 빠른 분야에 자원과 역량을 집중해 규모 있는 성장축을 만드는 접근이다.
반면 7대 SEED는 보다 긴 시간 축에서 미래를 바라본다. SMR, 핵융합, 재생에너지, 양자, 우주·항공, 첨단바이오, 첨단 공급망(핵심광물·소부장) 등 당장의 시장 규모뿐 아니라 향후 10~20년의 산업과 경제 안보를 좌우할 수 있는 기술에 미리 씨앗을 뿌리는 전략이다.
두 정책의 성격과 시간 축은 다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균형이 중요하다. 산업화 속도가 중요한 분야에는 과감하게 역량을 집중하는 동시에, 아직 시장의 불확실성이 큰 기술에도 꾸준히 투자해 미래의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현재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일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넓히는 일이 함께 가야 산업구조의 다양성도 커질 수 있다.
특히 7대 SEED는 기술 하나를 선정하고 연구개발비를 투입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씨앗이 산업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공공의 연구 성과, 혁신 창업, 투자, 실증 인프라, 수요기업과 글로벌 시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정부의 7대 SEED 추진 방안 역시 산·학·연 협력, 딥테크 창업, 투자형 R&D, 민관 합동 지원을 주요 실행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술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산업으로
그 과정에서 연구개발특구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대덕특구를 비롯한 전국의 연구개발특구에는 서로 다른 연구성과와 기술 자산이 축적돼 있다. 이를 기술이전이나 창업에서 끝내지 않고, 기업이 실증과 제조, 투자와 시장을 거쳐 성장하도록 연결해야 한다.
기술 하나, 기업 하나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산업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다. 대한민국에는 강한 제조업 기반이 있고, 대덕특구를 비롯한 연구현장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과학기술 자산이 있다. 이제 이 자산이 서로 다른 기업으로 태어나고 각각의 시장을 만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술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산업으로. 이 전환이 반도체뿐 아니라 바이오와 우주, 국방, 에너지 등 여러 딥테크 분야에서 반복될 때 산업 구조의 다양화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강한 주력산업에 더해 새로운 성장축이 끊임없이 더해지는 경제. 그것이 대한민국이 만들어야 할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이며, 연구개발특구가 기술사업화를 통해 뒷받침해야 할 다음 성장의 방향이다.
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hkjung90@innopolis.or.kr
〈필자〉서울대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미주리 콜롬비아대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했다. 제38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한 후 과학기술 분야 정부 부처에서 28년간 근무하며 국제협력관, 과학기술정책국장, 과학기술혁신조정관 등을 역임했다. 기술사업화와 산학협력, 국제협력, 국가전략기술 육성 정책 등을 이끌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 7월 3일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제7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연구개발특구를 딥테크의 전진기지이자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발전시키기 위해 딥테크 중심 기술사업화, 글로벌 협력 강화, 협업 기반의 혁신생태계 조성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