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K'의 지속 기반, 콘텐츠 진흥의 문법을 다시 짜려면

이성민 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이성민 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최근 콘텐츠 정책을 둘러싸고 새로운 제도와 수단을 찾는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 9월 프랑스를 방문한 대통령은 영화인들이 제안한 영화 투자 제도 '소피카(SOFICA)'를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귀국 뒤에는 해외에서 효과가 검증된 제도를 정책에 반영해 보라며 면밀한 연구를 지시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취임 100일 간담회에서 연관 기업이 공동 출자하고 진흥원이 권리관계를 조율하는 '한국형 제작위원회' 구상과 함께, 국고지원 중심인 진흥원을 출연금 기관으로 전환하자는 화두를 던졌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지난 6월 콘텐츠 산업의 특성에 맞는 정책금융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거버넌스 개편 연구에 착수했다.

이들 논의는 한국의 콘텐츠 산업 진흥을 위한 기존 정책수단의 한계에 공통으로 주목하고 있다. K컬처가 만들어 낸 새로운 기회를 이어 가야 하는 국면에서 콘텐츠 산업의 지속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그동안의 방법만으로는 지금의 문제를 풀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전례 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콘텐츠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던 경로에 큰 균열이 나타났다.

영화에서는 모태펀드와 벤처캐피털 중심의 프로젝트 투자가, 방송 드라마에서는 채널이 주도하는 편성과 제작비 투자가 작품의 출발점 역할을 해 왔다. 극장과 방송 광고 시장의 구조 변화로 이 두 공식이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으면서, 그 공백의 일부를 글로벌 플랫폼과의 대형 계약이 채우고 있다. 기존 경로 밖에서 다양한 규모의 콘텐츠가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 곧 인디 파이낸싱과 이를 뒷받침할 투자 주체도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세계 시장에서 'K'의 성과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지만, 정작 국내의 창작·제작 기반은 위축되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방송사들은 적자 부담 속에 평일 드라마 편성을 크게 줄였고, 드라마의 제작 기회도 함께 줄어들고 있다. 영화 역시 투자가 얼어붙으며 새로 제작에 들어가는 작품이 눈에 띄게 줄었다. 'K'의 다음 단계를 열려면 확산된 성과가 국내의 생산 조건으로 이어져야 한다.

창작자가 다음 작품을 기약할 수 있는 기회, 제작사가 역할에 걸맞은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협상 구조, 작품의 성과가 다음 제작으로 돌아오는 경로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글로벌 시장과의 연결은 계속 넓어지고 있다. 'K'는 이제 글로벌 기업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자원이 되었고, 한국의 성과를 본 경쟁국들의 추격도 거세다. 크리에이터가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할 기회가 늘면서, 한국이 자국의 요소 시장을 온전히 지켜 낼 수 있다는 전제도 흔들리고 있다.

영어권 국가들은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중력 속에서 자국의 인력과 제작 기반을 붙들기 위해 강력한 로케이션 인센티브를 내세워 온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어라는 언어 덕분에 그 중력에서 비켜나 독자적인 생산 기반을 지켜 온 조건이 이제 달라지고 있다. 한국의 매력이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국내 생산 기반을 지키는 일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문제가 바뀌었다면 푸는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 재원의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산업 전반의 어려움을 온전히 해결하기 어렵다. 콘텐츠 진흥의 문법, 곧 정책수단 자체의 재설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한국형 제작위원회'나 '소피카' 논의도 이 변화와 연결해 보아야 의미가 선명해진다. 프랑스 세제를 그대로 들여오거나 일본의 위원회 방식을 복사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산업을 지탱해 온 핵심 조건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다양한 규모와 단계의 콘텐츠가 시작될 수 있도록 제작·투자 모델과 공적 지원 방식을 다변화하는 상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일본 '제작위원회(製作委員会)'의 '제작(製作)'이다. 우리말에서는 작품을 직접 만드는 일(制作)과 자본을 모아 사업을 꾸리고 위험을 나누는 일(製作)이 한글로 똑같이 '제작'이라 적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제작위원회에서 주목할 것은 후자, 곧 콘텐츠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의 결합과 위험의 분담이다.

우리의 정책 논의는 여전히 '만드는 일 자체(制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영상콘텐츠 세제 지원도 작품을 직접 만드는 제작사의 비용 공제에 집중돼 있다. 위험을 지는 투자 행위에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논의는 이어져 왔지만, 현재는 문화산업전문회사 출자에 대해 제작에 쓰인 출자금액 기준 3%를 공제하는 수준에 그치고, 그마저 투자의 일부 형태로 한정돼 있다. 소피카의 시사점도 제도의 외형이 아니라, 시장에서 선뜻 투자로 이어지기 어려운 작품의 시작과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투자 행위 자체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콘텐츠 정책수단의 진화 - 콘텐츠 정책수단의 진화
콘텐츠 정책수단의 진화 - 콘텐츠 정책수단의 진화

지원사업의 운영과 전달체계도 전형적인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년도 지원이다. 진흥원의 사업은 기획부터 제작, 유통, 인력 양성까지 수많은 세부 사업으로 폭넓게 확장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단년도에 집행되는 전형적인 보조금 사업이다. 물론 다년도 지원을 시도한 실험이 없지는 않았다. 2024년 게임 분야 다년도 제작지원은 1차 연도 개발 결과를 평가해 2차 연도 출시까지 이어서 지원하도록 설계됐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여전히 예외적인 실험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은 대본 개발부터 제작, 편성과 공개까지 2~3년 가까이 걸린다. 그런데도 국고보조사업의 기본 틀은 콘텐츠의 생애주기보다 회계연도에 맞춘 집행과 관리의 편의에 무게를 둔다. 이런 방식은 정책 개입 시점을 한쪽으로 몰리게 하고 성과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제작을 마치고 공개되기까지의 여러 변수를 넘지 못해 기한 안에 사업을 마치지 못하는 작품이 늘면 사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현장의 필요를 반영해 정책을 만들고 예산을 확보해도, 지원 방법 자체의 한계 때문에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한국 콘텐츠 정책은 새로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정책수단을 '업데이트'하며 진화해 왔다. 보조금에서 출발해 모태펀드로 자본 시장의 투자를 활성화할 기반을 마련했고, 완성보증과 융자, 이차보전으로 콘텐츠 금융 정책을 고도화했으며, 2017년에는 영상콘텐츠 제작비 세액공제로 세제 수단도 도입했다. 이제 다시 한번 기존의 틀을 벗어난 정책수단을 고민할 때다.

글로벌 콘텐츠 산업과 K컬처의 지형 전반이 구조적으로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진흥의 문법이 필요하다. 관성적인 전달체계를 벗어나 지원 제도 전체를 다시 짜는 과감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K를 지속시키는 기반'을 향해 정책수단과 전달체계를 얼마나 과감하게 재설계하느냐에 따라 K콘텐츠의 다음 10년도 달라질 것이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sky153@knou.ac.kr

〈필자〉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디어-콘텐츠 정책 분야와 미디어 역사 분야에서 다수의 연구를 수행해왔다. 문화정책 분야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콘텐츠 산업 현장의 변화를 정책의 언어로 담아내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주요 연구로는 '한국 신문의 사회문화사'(공저, 2013), '언론사 문화사업의 역사와 사회적 의미'(공저, 2014), '콘텐츠 산업 트렌드 2025'(공저,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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