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K팔란티어, 설계와 생산을 잇는 데서 시작해야

박승훈 위즈코어 대표이사
박승훈 위즈코어 대표이사

정부가 민간의 혁신기술을 안보역량과 산업 성장으로 이어 가려는 '한국형 팔란티어(K-Palantir)'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 구상이 산업 현장에 뿌리내리려면 방산과 첨단산업을 뒷받침하는 제조 소프트웨어(SW)에 주목해야 한다. 정교한 설계를 실제 생산으로 구현하고, 요구한 품질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능력이 산업 경쟁력과 안보역량을 함께 지탱하기 때문이다.

제조현장의 데이터는 부족하지 않다. 캐드(CAD) 도면, 작업지시서, 설비 운전 기록, 공정 조건, 품질검사 결과가 매일 쌓인다. 문제는 이 자료들이 서로 다른 시스템과 부서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같은 부품의 이름이 시스템마다 다르고, 설계변경 이력이 생산 당시의 공정 조건이나 검사 결과와 이어지지 않기도 한다.

불량이 발생하면 담당자는 도면과 생산 기록, 설비 이력을 찾아 대조한다. 자료를 모았더라도 그 관계를 해석하는 데는 숙련자의 경험이 필요하다. 오래 일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원인 파악이 늦어지는 이유다. 숙련된 엔지니어가 머릿속에서 연결해 온 지식을 시스템에 담아야 한다.

제조 분야의 K팔란티어는 이 문제를 푸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불량이 늘어난 이유, 설계변경의 영향, 추가 점검이 필요한 설비와 제품을 근거와 함께 보여주는 시스템이다. 열쇠는 설계 데이터에 있다.

설계 도면에는 형상과 치수, 재질, 공차 등 제조의 기준이 담겨 있다. 생산 데이터가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보여준다면, 설계 데이터는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만들려 했는가'를 설명한다. 두 정보를 함께 봐야 생산 결과가 설계 의도와 일치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36년간 CAD SW를 개발해 온 필자는 최근 설계정보를 제조 데이터와 잇는 일에 주목하고 있다. 도면에서 치수와 재질을 추출하는 기술은 첫걸음일 뿐이다. 그 정보가 어느 공정의 작업 조건과 관련되고, 어떤 품질 항목에 영향을 주는지까지 알아야 현장에서 쓸 수 있다. CAD 개발 역량과 스마트팩토리 구축 경험이 함께 필요한 이유다.

그러려면 설계 SW 개발자와 생산현장 엔지니어가 같은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도면의 객체를 읽는 기술에 설비·공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경험이 더해져야 설계정보를 생산과 품질 판단에 쓸 수 있다.

그 방법의 하나가 온톨로지(Ontology)다. 부품과 제품, 공정과 설비, 검사 기준 사이의 의미와 관계를 정의하는 체계다. 특정 부품이 어떤 제품에 쓰이고, 어느 설비에서 가공되며, 어떤 기준으로 검사되는지를 이으면 서로 다른 시스템의 기록을 하나의 업무 흐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온톨로지를 도입한다고 데이터가 저절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같은 부품의 이름부터 맞추고, 생산 당시 유효했던 도면 버전을 구분해야 한다. 설비마다 데이터의 단위와 기록 시각이 다르면 분석 결과가 흔들릴 수 있다. 이런 기초 작업이 제조 AI의 신뢰도를 좌우한다.

부품의 치수를 변경한 뒤 불량이 늘었다면 변경 전후 도면과 가공 조건, 사용 설비, 검사 결과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AI는 원인 후보와 추가 점검 대상을 제시하고, 엔지니어는 그 근거를 확인해 조치 순서를 정한다. 이때 참조한 기록은 추적할 수 있어야 하고, 자료가 부족해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같은 구조는 문제 예방에도 쓸 수 있다. 재질이나 공차를 바꿀 때 공정 조건과 검사 기준, 작업지시의 수정 필요성을 미리 검토할 수 있다. 변경된 설계가 현장에 전달됐는지, 이전 기준으로 생산한 제품은 어디까지인지도 추적할 수 있다. 설계에서 생산과 품질까지 정보를 이어 주는 이 흐름을 디지털 스레드(Digital Thread)라 한다.

방산과 첨단 제조에서는 이 능력이 더욱 절실하다. 부품 구성이 복잡하고 품질 기준이 엄격할수록 작은 변경의 영향도 넓게 퍼질 수 있다. 협력업체의 공정이나 공급 부품이 달라졌을 때 어떤 제품과 검사 항목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 신속히 파악하려면 설계와 생산 이력이 정확히 이어져 있어야 한다.

제조 SW는 국제 표준을 준수하고 기존 시스템과의 호환성을 갖추며, 현장의 변화에 맞춰 지속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고객이 특정 공급업체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데이터를 활용하며 시스템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선택권은 제조업의 기술 자립과도 직결된다.

개별 공장의 구축 실적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반복 적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공장마다 처음부터 다시 개발해서는 확산에 한계가 있다. 부품·공정·설비·품질의 공통 구조를 갖추되 현장별 차이는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장 경험을 재사용 가능한 SW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 기업의 몫이다.

정부도 실증 이후의 구매와 확산까지 고민해야 한다. 연결한 데이터의 양이나 구축한 시스템 수보다 설계변경 검토 시간이 줄었는지, 품질 원인을 빨리 찾았는지, 생산 이력을 정확히 추적했는지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민간 공장에서 검증한 기술이 방산과 신안보 분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수요기관과의 접점도 넓혀야 한다.

제조 AI의 가치는 엔지니어가 문제를 더 빨리 찾고 근거를 갖고 조치할 수 있는지로 판가름난다. 제조현장에 쌓인 설계 자산과 생산 경험 사이의 끊어진 고리를 잇는 일이 먼저다. 이 기술을 실제 공장에서 검증하고 성과가 확인되면 넓혀 가는 것, 그것이 제조 분야 K팔란티어를 키우는 길이다.

박승훈 위즈코어 대표이사 paul@ca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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