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가 3년 뒤에나 제공할 장비의 공급 계약을 서둘러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제조사가 인공지능(AI) 인프라 수요에 대응, 경쟁적으로 설비 투자에 나섰기 때문으로 평시 대비 1~2년 빠른 행보다.
구매 급증과 한정된 생산 능력 탓에 반도체 장비 공급 기간(리드타임)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미리 장비를 확보하지 않으면 AI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반도체 제조사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SML·램리서치·도쿄일렉트론(TEL)·KLA 등 세계 상위 반도체 장비사들은 2028년 장비 공급 계약 마무리 단계에 진입했다. 동시에 일부는 2029년 공급 가능한 장비 구매주문(PO) 논의도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전공정 중심으로 반도체 공장(팹)에 장비를 서둘러 반입하려는 수요가 급증했다”며 “TSMC·마이크론·인텔 등 글로벌 기업의 핵심 장비 파트너사가 2029년 공급 전략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해외 반도체 제조사와 직접 거래하는 국내 장비사 일부도 2~3년 후 공급 방안을 미리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팹에 장비를 반입하기 위한 공급 계약 논의는 통상 도입 6~12개월 전 시작된다. 반도체 제조사가 필요한 장비와 기술 검증, 장비사 공급 여력 등을 고려해서다. 구매주문 후 납품까지 3~6개월 걸리는 만큼 여유를 가지고 계약을 추진해왔다.
AI 인프라 투자 열기가 지속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제조사들이 동시에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하면서 장비 납품 기간(납기)이 대폭 길어졌다. 현재 반도체 장비 납기는 평시 대비 2배 이상 늘어나 최대 2년 이상 걸리는 품목도 있다. 반도체 제조사 입장에서는 장비를 선점하기 위해 계약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다.

주요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들은 생산능력(캐퍼)을 확대하고 장비 설치·가동(셋업) 시간을 단축하며 대응하고 있지만, 수요에 맞추는 건 역부족이다. 지난달 실적을 발표한 ASML은 2028년까지 반도체 노광장비 공급에 차질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향후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방안도 동시에 검토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장비사 고위 임원은 “3년 뒤 장비 공급을 현 시점에서 논의하는 건 이례적”이라며 “제조사 팹 투자 현황을 고려했을 때 이같은 추세가 2030년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현상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제조사가 팹 투자를 지속 추진하고 있어서다. 해외 경쟁사와의 장비 확보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선제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전공정과 후공정 투자를 병행하는 만큼 경쟁사보다 빨리 장비 도입 계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후공정 영역까지 확산될 수 있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제조사도 핵심 공정 장비를 선점하기 위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