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망경]신산업의 규제계곡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원격의료 서비스를 비즈니스 모델로 하는 한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가 긴 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이 CEO는 올해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하기로 했다.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이른바 '플립'(Flip)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 초기만 하더라도 그는 우리나라에서 원격의료 규제가 완화될 것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남달랐다. 취임 초부터 원격의료 허용을 언급했기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코로나19 사태로 기회의 문이 열릴 것처럼 보였지만 그 또한 희망고문의 하나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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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 로봇도 마찬가지다. 현행법상 도로 주행 자체가 불법이다. 개인정보보호법, 도로교통법,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등 여러 가지 '대못'을 한꺼번에 뽑아야 사업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주 문 대통령은 20년 만에 찾아온 '제2 벤처 붐'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범정부 차원의 '벤처보완대책'도 발표했다. 인력·자본 유입에 초점을 맞췄다. 무려 31개의 세부 추진 과제가 담겼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신산업 규제 해소를 위한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규제샌드박스, 규제자유특구 신설 등을 주요 성과로 언급했을 뿐이다. 정부가 규제샌드박스로 '임시허가' '실증특례' 등의 길을 터 주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본 사업을 벌이기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정부가 골치 아픈 규제 문제는 규제샌드박스로 다 떠넘긴다는 말이 업계에서 나올 정도다. '벤처 성공신화'가 많으면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사람과 돈이 몰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규제에 발목이 잡혀서 주저앉는 사례가 반복해서 발생하면 많은 사회적 비용이 필요해진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 '추격 시대를 넘어 추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선 신산업 성공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규제는 큰 걸림돌이다. 정부가 먼저 '규제 계곡'을 꼼꼼히 짚어 보길 바란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