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78>제7차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

1980년 7월 14일 제7차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가 서울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0년 7월 14일 제7차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가 서울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0년 6월 5일. 싱그러운 초여름의 시작이었다. 오전 11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연수원 회의실에서 13개 분과위원장과 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구국의 결심으로 부강한 민주 번영 국가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국보위 13개 분과위원회는 이날부터 중앙교육원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숨 막히는 정국이었지만 분야별로 권력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제과학분과위원회는 김재익 위원장을 비롯해 최상진 육군대령, 오관치 육군중령, 윤덕용 한국과학원 교수, 김안제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조경목 과학기술처 원장력안전국장 등 위원 6명과 홍병유·양수길 박사 등 전문위원 2명 및 행정요원 선일봉씨 등 9명으로 구성했다.

경과분과위원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실력파였다. 김재익 분과위원장을 비롯해 6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과학기술처에서 파견된 조경목 국장도 일 잘하는 공직자로 소문났다. 이들은 국내 과학기술 진흥과 미래 도약을 위한 경제·과학기술 정책의 조타수 역할을 했다.

경과위 분과위원으로 활동한 김안제 교수의 생전 회고.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국보위 경과분과위원으로 차출돼 삼청동 소재 중앙교육원으로 6월 5일 첫 출근을 했다. 경과분과위원에서 김재익 분과위원장과 함께 일했다. 내 전공은 환경이나 지방자치 등인데 지역경제학 박사라는 타이틀만 보고 경과위로 보낸 게 아닌가 생각했다.”

분과위원들은 오전 8시 이전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했다. 윤기병 당시 국보위 공보실장도 “당시 분과위원들은 하루 12시간씩 고된 일과를 보내며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증언했다.

경과분과위는 소관 부처인 경제기획원과 과학기술처 등 업무보고를 받고 구체적인 정책 방침을 하나씩 결정했다. 경과분과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김재익 분과위원장이었다. 그는 분과위원장 임명 이튿날부터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경제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 위원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김재익 전 수석의 부인 이순자 전 숙명여대 교수의 회고록 증언. “당시 그는 국보위 참여를 거절했지만 워낙 서슬이 시퍼런 시절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국보위 출근 이튿날부터 매일 새벽 5시 반에 자동차가 집으로 와 남편을 태우고 갔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상임위원장 집으로 가서 매일 2시간 경제 강의를 하고 출근하는 '경제가정교사' 생활을 했습니다.”(시대의 선각자 김재익)

김재익 분과위원장은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 현상도 간단하고 쉽게 설명했다. 그의 브리핑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경제 기본원리부터 시작해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와 처방에 이르기까지를 특유의 명쾌한 논리로 차근차근 강의했다. 경제에 관해 흰 종이와 같았던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머릿속 경제 도화지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 경제를 보는 안목과 통찰력 등을 그려 넣었다. 전두환 위원장은 궁금한 경제문제가 있으면 수시로 김재익을 찾았다. 심지어 퇴근길에 호출받고 급히 연락하면 “아까 설명한 그 부문을 다시 설명해 주게”라고 하는 등 경제학습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그해 7월 14일. 국내 최대 과학기술자들의 축제 마당인 제7차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가 이날 오후 3시 민관식 대회장(전 문교부 장관)과 성좌경 과학기술처 장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윤일선 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권이혁 서울대 총장과 재미과학자 180여명을 비롯한 국내외 과학기술자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한 이 대회는 7월 24일까지 서울대 관악캠퍼스와 충남 대덕전문연구단지에서 전자와 전기, 통신, 우주과학, 생명과학 등 12개 분과로 나눠 150여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국내 산업시찰도 했다.

성좌경 과학기술처 장관은 개회식 치사를 통해 “과학기술 혁신으로 1980년대 한국 과학기술 진흥으로 국민복지 향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과학자 여러분의 노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첫날 개회식 후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의 역할'이란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국보위 경과분과위는 내부 논의를 거쳐 과학기술 정책 추진 방향을 아래와 같이 정했다. “한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은 곧 그 나라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하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한 국내외의 어려운 여건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1980년대 민주복지 국가건설이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려면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에 국보위는 과거 1960~1970년대 구축한 과학기술 기반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문제점을 보완해 기술혁신을 도모할 수 있도록 각종 제도를 개선하고 새로운 시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국보위 백서)

경과분과위는 이에 따라 획기적인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연구기관 운영 합리화 △기술인력 양성 △민간기업 기술개발 조장 △산업전문 기술 육성 등 4개 분야 정책을 집중해서 다루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출연연구기관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슷한 연구소끼리 연합해 계열별로 긴밀한 연결체제를 구축하고 효율적 관리방안을 마련하자는 의견 등을 제시하는 연구기관도 있었다. 경과분과위가 이런 문제를 그대로 넘길 리 없었다.

그해 8월 어느 날. 경과분과위원회 회의실. 김재익 위원장 주재로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폐합에 관한 사항을 안건으로 상정해 집중 토의를 진행했다. 연구기관을 통폐합해 '선택과 집중'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 마련 및 계획을 토의하고 추진 방침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국내 연구기관에는 통폐합의 기로에 설 민감한 안건이었다.

경과분과위는 이날 회의에서 치열한 토의를 거쳐 아래와 같이 세부 추진 방침을 결정했다. 첫째 당시 7개 정부 부처가 운영하던 19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최소 규모로 통합해서 관리직을 포함한 간접 지원 경비를 줄이고, 연구개발비 비중을 높이도록 한다. 둘째 중복 연구를 방지하고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들 정부출연연구기관을 과학기술처 산하로 이관해서 연구개발 종합조정 기능을 강화한다. 셋째 민간기업의 부설 연구소 설립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기술개발촉진법을 개정·보완하고 연구원에게 병역특혜를 준다. 공동 연구개발과 정부 연구비 지급 근거를 마련한다. 넷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과학원(KAIS)을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현 KAIST)을 출범시킨다. 다섯째 정부와 산·학·연의 협동 연구개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연구개발 성과를 높이기 위해 정부는 매년 200억원 규모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한다.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과학기술 제도 개선의 예령(豫令)이었다. 조경묵 당시 경과분과위원의 회고. “당시 정부는 작고 강하고 일하는 정부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국가 과제로 중화학공업 구조조정과 긴축 균형예산 편성, 국가 연구개발 체제 구축 등을 선정했다. 정부가 투입키로 한 연구개발비는 1982년 이후 정부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제도화했고, '기술진흥확대회의' 설치 운영과 더불어 1980년대를 이끈 기술 드라이브 정책의 핵심 역할을 했다.”

그해 8월 4일. 성좌경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날 그동안 학력을 중시하던 국가기술자격제도 응시 자격을 대폭 완화하고 현장 경험과 능력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처가 이날 발표한 국가기술자격제도 개선방안에 따르면 종전 실업고 졸업자와 공공직업 훈련이나 사내 대학훈련을 1년 이상 받은 기능인에게만 주던 기능사 2급 응시 자격을 현장 경험이 있는 기능인이면 누구나 학력 불문하고 응시할 수 있도록 관계 법령을 개정, 1981년부터 시행키로 했다. 또 기술계 대학이나 전문대 졸업자에게 의무적으로 시행하던 기사 1급과 기사 2급 의무검정을 폐지하고 기술자격자에 대한 각종 우대 조치를 확대키로 했다.

이 같은 개선방안은 1980년대 고도 산업국가 건설에 중추 역할을 할 우수 기술 인력 확보를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