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보건의료·핵심산업·생필품 생산 차질 없도록 최우선 공급”

중동 전쟁 장기화로 촉발된 석유화학 원료 수급 불안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자 정부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납사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수출 물량을 전량 내수로 돌려 공급망 붕괴를 막겠다는 조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7일 자정을 기해 '납사 수출제한 및 수급 안정을 위한 규정'을 관보에 고시하고 즉시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우선 5개월간 한시적으로 적용된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생산된 모든 납사는 원칙적으로 수출이 금지되며, 이미 계약된 수출 물량도 예외 없이 국내 공급으로 전환된다. 다만 산업부 승인을 받은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수출이 허용된다.
납사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기초 원료로,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을 거쳐 플라스틱, 섬유, 고무, 포장재 등 다양한 산업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소재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제조업에도 폭넓게 사용되며 산업 전반의 '기초 체력'을 좌우하는 물질로 평가된다.
문제는 국내 수급 구조다. 한국은 납사 수요의 약 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77%가 중동산이다. 최근 중동 지역 정세 불안이 심화되면서 수입 차질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고,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도 생산량을 줄이면서 재고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약 2주 수준에 불과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이번 조치를 통해 기존 수출 물량 약 11%를 전량 국내로 돌려 단기적인 수급 충격을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양기욱 산업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국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을 해외로 반출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 취지”라며 “국내에서 활용이 어려운 일부 중질 납사 등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수출을 허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급 관리도 대폭 강화된다. 정유사와 석유화학사는 납사의 생산·도입·사용·판매·재고 현황을 매일 산업부에 보고해야 하며, 주간 반출 비율이 전년 대비 20% 이상 감소할 경우 정부가 판매·재고 조정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사재기와 시장 교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통상 분쟁 가능성에 대해 정부는 선을 그었다. 양 실장은 “납사 수출제한 조치가 통상 문제가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산업부는 중동 전쟁 직후 납사를 경제안보 품목으로 지정하고 공급망 기금을 통한 저리 융자 등 지원을 시행해 왔으며, 이번 조치를 통해 대응 수위를 한층 끌어올렸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납사는 대한민국 산업을 지탱하는 핵심 기초 원료”라며 “국외 도입 지원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물량 확보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어 “보건의료와 핵심 산업, 생활필수품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납사를 최우선적으로 공급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준희 기자 jh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