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연구개발(R&D) 체계가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기술패권 경쟁 심화, 지역 소멸 위기 등 복합적인 환경 변화 속에서 연구지원기관 역할도 단순한 연구비 지원을 넘어 국가 혁신 방향을 설계하는 수준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 한국연구재단(NRF)이 있다. 연구재단은 기초연구 지원과 인재 양성, 국가전략기술 육성, 국제협력 확대 등 국가 연구생태계를 뒷받침하는 핵심 기관이다. 최근에는 연구현장 중심의 정책 설계와 AI 기반 연구혁신, 청년 연구자 지원 확대 등을 통해 국가 R&D 혁신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홍원화 연구재단 이사장은 단순한 연구관리 기관이 아닌 '국가 R&D 방향 제시자'로 재정립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연결하고, 축적된 연구 데이터를 활용해 미래 연구 아젠다를 발굴하는 한편, 글로벌 연구 허브 구축에도 힘을 쏟고 있다.
올해 창립 17주년을 맞은 연구재단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홍 이사장을 만나 연구재단의 역할 변화와 국가 전략기술 경쟁력 확보 방안, 젊은 연구자 육성 및 지원 정책, AI 시대 연구혁신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김정희 전자신문 전국부 부장
-이사장 취임 후 어느덧 임기 절반을 넘겼다. 지난 1년 반을 평가한다면.
▲지난 1년 반은 대한민국 학술·연구 생태계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선도하기 위한 치열한 대혁신의 여정이었다. 연구 현장을 섬기고(Servant), 내부 시스템을 지능화(Empowerment)하며, 국가 R&D의 명확한 비전을 제시(Stewardship)하겠다는 세 가지 리더십 원칙과 더불어 4대 하이퍼 전략 아래 끊임없는 혁신에 도전했다. 또 현장 중심 소통을 이어가며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의견을 수렴한 결과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는 확신을 얻었고, 빠른 성과보다는 지속 가능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현장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했던 것은 '무너진 연구 사기 진작'을 위한 기본연구 등 R&D 예산 복원 및 확대, 행정 부담 완화였다.
이런 현장 고충을 정부와 국회에 선제적으로 제안하고 끈질기게 설득해 '연구 생태계 도약'을 이끌었다. 전국 권역별 간담회를 통해 발굴한 190건의 현장 수요를 정책에 반영해 2026년 기초연구 예산을 역대 최대치인 3조3600억원으로 확충했다. 특히 연구자들이 갈망하던 풀뿌리 기본연구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글로벌 톱 수준 연구 성과를 견인하며 기초연구 강국 저변을 탄탄히 다졌다. 'AI-NRF' 비전과 임파워먼트를 통한 조직 대전환도 이뤘다.
조직의 의사결정 단계를 축소해 유연한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 전사적 AI 대전환(AX)을 추진한 것도 주요 성과다. 구성원들이 단순 행정을 넘어 국가 전략 기획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했으며, 방대한 공공 데이터를 개방하고 AI 기반 안전보건 혁신을 추진하는 등 기관 운영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마지막으로 '국가 R&D의 새로운 방향 제시자'로서 역할을 확대했다.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ISE) 및 지역성장 인재양성체계(ANCHOR)를 통해 지역과 대학 중심 인재 양성 기반을 다졌으며,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을 지원하는 등 연구자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올해 창립 17주년을 맞는다. 기관의 역할 강화 방향은.
▲연구재단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77년 한국과학재단 설립 이후 대한민국 R&D와 함께 호흡해 온 50년의 역사가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연구재단은 기초연구지원사업, BK21, LINC 사업 등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 적재적소 정책을 제시하며 대한민국 학술·연구 발전의 마중물이자 디딤돌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결과 연간 국가 R&D 예산 점유율은 5%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체 SCI 논문의 35.5%와 피인용 상위 1% 논문의 32.8%를 배출하는 등 압도적인 연구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연구재단은 예산 10조원 시대를 앞둔 세계적 규모 연구 지원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단순한 '펀딩 에이전시'라는 규모의 성장을 넘어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를 아우르는 국내 유일의 통합 전문기관으로서 그 위상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단순히 관리자 역할을 넘어 국가 연구혁신을 주도하는 플랫폼으로의 발전 필요성 또한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기업을 잇는 전략적 허브이자, 국가 R&D 생태계 방향을 이끄는 '방향 제시자' 역할을 강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후 관리자'에서 '사전 기획자'로 거듭나고자 국내외 연구 트렌드 분석, 유사 과제 중복 점검, 미래 기술 수요 예측 등 역량 내재화에 집중하고 있다. 국가 R&D 방향성을 제시하는 지식 파트너로 도약하고, 도전적 설계와 목표 중심 성과 관리를 통해 혁신적인 연구 성과 창출을 견인하는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연구재단이 보유한 수십만 건의 연구과제 정보, 연구자 이력, 논문·특허 성과 데이터의 활용 가능성도 끌어올리고자 한다. 이 데이터를 AI와 결합해 연구자들에게 맞춤형 협력 파트너를 연결하고, 필요한 곳임에도 지원이 미치지 못한 연구 공백을 찾아내며, 정책 입안자에게는 증거 기반 투자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으로 도약해야 한다. 즉 데이터를 단순히 쌓는 것을 넘어 데이터 기반의 통찰을 제공하는 지능형 기관으로 탈바꿈하겠다.
'글로벌 연구 허브'로서의 위상도 강조되고 있다. 단순 국제 교류를 넘어 해외 우수 연구자가 대한민국을을 선택하고, 우리 연구자가 세계 공동연구 중심에 설 수 있는 글로벌 표준 환경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언어, 행정, 문화적 장벽을 낮추고 제도적 유연성을 확보해 한국이 세계적인 연구 허브로 자리매김하도록 연구재단이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연구재단이 국가전략기술 육성에서 맡아야 할 역할은.
▲국가 전략기술 분야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기초·원천 연구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에 따라 연구자 중심의 자유롭고 근본적인 진리 탐구를 추구하는 기초연구와 국가 중장기 계획 및 로드맵에 따라 목적 달성을 지향하는 국가전략연구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연구 현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전략기술 분야는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 지원이 필수적이기에 연구재단 국가전략연구본부는 기획부터 관리까지 전 과정을 밀착 지원하고 있다.
목적성이 뚜렷한 전략기술 분야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리더십 또한 중요하다. 이를 위해 신약, 차세대 바이오, 반도체·디스플레이, 양자 기술 등 11개 핵심 기술 분야별로 국내 최고 수준 전문가들을 프로그램 매니저(PM)로 영입해 연구기획부터 평가 및 관리까지 전문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올해 기준 11개 분야에 약 2조7168억원을 집중 투자해 전략기술 육성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기초연구를 수행할 인재 부족도 큰 문제다. 해결 방안은.
▲청년들이 연구자 길을 기피하는 현상은 단순히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사회 환경의 변화, 인구구조 변동, 대학의 규모 축소 및 교원 고용 구조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젊은 연구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오직 연구 그 자체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과 튼튼한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우선은 역량을 갖춘 연구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오직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보편적 지원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다. 연구자에게 가장 큰 취약점은 연구비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사라져야 비로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독창적이고 모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재단은 연구자가 학문의 길에 들어선 첫걸음부터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할 때까지 중단 없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생애주기별 안정적 지원 체계'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더불어 연구비라는 재정적 지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장의 깊은 신뢰를 받는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국가 R&D의 본질적 목표에 충실하면서도 연구자와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투명한 연구비 관리 체계를 다져나갈 것이다.
인문사회분야의 균형 있는 성장 또한 필수적이다. 철학이나 역사 등 기초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우리 사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인구 소멸, 기후 위기, AI 시대로의 급격한 전환이라는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적 접근을 넘어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인문사회적 통찰이 반드시 융합돼야 한다. 이에 청년 학자들이 창의적 연구를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 확대를 중요한 방향성으로 삼고 있다.
-AI가 R&D 방식도 바꾸고 있다. AI를 활용한 연구기획·평가 혁신 가능성은.
▲AI 기술은 연구기획·평가·관리 업무를 한층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돕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연구 현장을 보면 AI는 단순히 연구 수행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R&D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과거에는 연구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많은 전문가가 오랜 시간 논문과 특허를 일일이 검토해야 했다면, 이제는 AI를 활용해 방대한 연구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기술 흐름이나 유망 연구 분야를 신속하게 포착할 수 있게 됐다. AI가 연구자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하는 'AI Co-Scientist'의 시대가 도래했다.
평가 분야에서도 AI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평가자료 검토를 보조하고, 연구 분야에 최적화된 평가위원 후보군을 탐색하는 일을 지원하며, 연구 성과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등 평가 효율성과 일관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자들이 반복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각종 자료 작성 부담을 줄이는 데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연구과제 관리 업무 역시 자동화와 지능화를 통해 연구재단 행정 효율을 높이고, 연구자들의 편의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연구 가치와 가능성을 판단하는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하며, 사람과 AI가 협업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AI가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지원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과 책임은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 앞으로 연구재단은 AI를 적극 활용해 연구기획과 평가·관리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여 나가되, 연구자와 전문가의 통찰이 중심이 되는 사람 중심의 연구지원 체계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최근 연구관리혁신협의회 회장으로도 선출됐다. 국가 R&D 혁신 정책과 관련해 연구관리기관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지.
▲연구관리혁신협의회는 국가 R&D 사업을 기획·평가·관리하는 18개 전문기관 협의체다.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은 개인적 영광을 넘어 연구재단이 대한민국 R&D 생태계를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은 것으로써,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앞으로는 기관별 전문성 차별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동안 연구관리 전문기관들은 연구지원이라는 공통된 기능으로 인해 운영 방식이 어느 정도 비슷해 다소 획일화된 측면이 있었다. 이에 각 기관이 보유한 고유한 강점과 특성을 극대화해 소관 부처별 R&D 투자 효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범부처 차원 역량 결집과 시너지 창출 역할도 중요하다. 각 전문기관이 개별적으로 보유한 정보와 자원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협력해 R&D 관리 역량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
정책과 현장을 잇는 가교 역할도 강화하고자 한다. 정부의 R&D 혁신 정책이 연구 현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단순히 행정적인 지원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정책 방향과 연구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연결하는 가교로서 그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남은 임기 핵심 과제를 꼽는다면.
▲남은 임기 대한민국 학술·연구 생태계의 미래 지형을 바꿀 네 가지 핵심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첫 번째 과제는 대학 중심의 국가 R&D 생태계 구축과 복잡한 규제 혁파다. 대학은 지식과 혁신의 산실이자 국가 성장동력의 뿌리라 볼 수 있다. 미국 NSF나 NIH와 같이 연구자 사기를 진작하고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선도형 R&D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관계 부처와 적극 협력해 연구 현장의 발목을 잡는 불필요한 행정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고 대학 중심의 역동적인 연구 생태계를 안착시키겠다.
지·산·학·연 협력을 통한 지역 혁신 생태계도 완성하고자 한다. 저출생과 지방소멸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지자체·지역 대학·산업계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모델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17개 광역 시도 앵커 센터와 소통을 강화해 지역 특화 산업에 맞춘 초격차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이 지역에 정주하며 경제 활성화를 주도하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해 중앙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이 현장에서 실효성 있게 뿌리내리도록 지원할 것이다.
연구관리 전문기관의 고유 전문성 강화 및 AI 기반 행정 혁신에도 집중할 것이다. 현재 연구재단이 추진 중인 AI-NRF 대전환 전략을 가속화해 기획·평가·행정 전반에 생성형 AI와 데이터 개방 체계를 이식하겠다. 이를 통해 연구 행정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전 세계가 주목하는 혁신적인 연구 플랫폼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마지막으로 학문 분야 간 '공진화(Co-evolution)'의 장 마련이다. 기후변화, 고령화, AI 윤리 등 오늘날의 난제들은 특정 분야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단순히 분야를 섞는 융합을 넘어 서로의 질문에 자극받아 함께 성장하는 공진화가 필요하다. 인문학이 AI의 방향을 제시하고, AI가 인문학적 질문을 확장하는 것과 같은 상호작용이 대표적이다. 인문사회와 이공계 전 분야를 아우르는 연구재단 강점을 극대화해 지적 대화가 실제 연구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이종 분야 연구자 간의 매칭 지원 및 평가 체계를 마련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다.

◇홍원화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홍원화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은 건축공학 분야 연구자로, 경북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북대 교수와 공과대학장, 산학연구처장, 제19대 경북대 총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과 국가교육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 고등교육 정책에도 참여했다. 제8대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2026년부터 연구관리혁신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이인희 기자 leei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