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산물 저장 상태와 출하 시기를 경험이 아닌 데이터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사과의 무게 감소율로 상품성이 떨어지는 시점을 예측하고, 참외와 양파는 저장 온도와 처리 방식에 따른 손실을 수치로 확인하는 방식이다. 농촌진흥청은 이를 통해 산지유통센터(APC)의 재고 관리와 출하 의사결정을 고도화한다는 구상이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은 21일 원예작물의 수확 전후 품질 정보를 통합·시각화한 웹 기반 '농산물 품질백서'를 구축하고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올해 사과·참외·양파 3개 품목을 우선 적용하고 내년 상반기 11개 품목, 36개 품종으로 확대해 대국민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그동안 농산물 유통 현장에서는 크기와 무게, 색상 등 외관 중심의 선별 기준을 적용해 왔다. 저장 물량 역시 먼저 입고한 농산물을 우선 출하하는 선입선출 방식에 의존했다. 수확 이후 품질 변화에 관한 연구 결과는 축적됐지만 측정 기준이 제각각이고 자료도 흩어져 있어 현장에서 활용하기 어려웠다.
품질백서는 지역·품종별 재배 이력부터 수확 직후 품질, 저장 방법과 환경에 따른 변화까지 하나의 플랫폼에 담았다. 저온 저장과 가스 조절 저장(CA), 포장재를 이용한 환경 조절 저장(MA) 등 기술별 품질 유지 기간을 그래프로 비교할 수 있다. 당도·산도·경도·색도 등 품질 측정 기준도 일원화했다.
사과는 저장 중 무게 감소율이 5%와 8%에 도달하는 시점을 제시해 출하 판단을 돕는다. 특히 CA 저장 기술을 적용하면 일반 저온 저장보다 출하가 어려워지는 시점을 65일 늦출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외는 수확 시기와 열매가 열린 순서에 따른 색상 차이를 반영해 품질 측정 기준을 마련했다. 저장 온도별 갈변율과 손실률을 비교한 결과, 저온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적정 저장 온도로 10℃를 제시했다.
양파는 예비 건조(큐어링) 처리 효과를 수치화했다. 0℃에서 7개월간 저장한 실험 결과, 예비 건조를 거친 양파는 무처리 대비 중량 감소율이 54.3%, 싹이 튼 비율은 55.1%, 부패율은 66.3% 낮았다.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관리 기준을 마련한 셈이다.
농진청은 저장 관리뿐 아니라 소비자가 체감하는 맛을 기준으로 농산물을 선별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반 카메라로 촬영한 RGB 영상을 분석해 사과의 당산비를 판별하는 기술이다. 당산비는 당도와 산도의 비율로 단맛과 신맛의 균형을 나타내는 지표다.
기존에는 사과의 무게와 색상을 중심으로 선별했지만 이 기술을 활용하면 과일을 자르지 않고도(비파괴)맛에 따른 등급을 구분할 수 있다. 농진청이 개발한 판별 모델은 당산비가 낮은 저품위 사과를 90% 이상 선별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내년에는 실제 선별장비에 적용하기 위한 현장 실증을 추진한다.
농진청은 충북 보은의 사과 APC와 서남부 지역 양파 농협 등 주산지를 중심으로 현장 적용을 추진할 예정이다. 스마트 APC에서 생성되는 입고·저장·출고 정보를 품질백서 데이터와 연계해 저장 손실을 줄이고 출하 시기를 정밀하게 조정하는 것이 목표다.
내년에는 복숭아·배·단감·감귤·포도·멜론·버섯 등으로 적용 품목을 확대한다. 고령 농가와 유통 현장 종사자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래프 중심의 시각화 기능을 강화하고 교육도 병행할 계획이다.
김대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장은 “품질백서는 수확 후 관리를 주관적 경험에서 객관적 데이터로 전환하는 첫걸음”이라며 “산지와 유통 현장에서 최적의 출하 시점을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 중심의 품질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겠다”고 말했다.
박효주 기자 phj20@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