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사막과 밀림을 지나려면 열악한 기후를 견뎌야 하고, 맹수도 피해야 한다. 길동무 없이는 헤쳐 나갈 수 없어 생겨난 말인 듯하다.
![[전문가기고]한국 반도체산업, 멀리 보고 함께 가야할 때](https://img.etnews.com/photonews/1307/449101_20130711190851_349_0002.jpg)
세계 시장규모가 연 300조원에 이르는 반도체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분업화가 잘 돼 있다. 소자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 소자의 레이아웃을 검증하는 디자인 하우스, 반도체 소자를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소자를 제품화하고 검사하는 패키징과 테스트 업체 등 다양하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처럼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까지 직접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도 있다. 그러나 종합반도체기업도 단독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많은 재료가 필요하고 다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는 `분업`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세계 1위 반도체 국가로 발돋움했다. 메모리 분야는 세계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섰고, 시스템반도체 분야도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CMOS 이미지센서(CIS)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국내 장비·소재·부품업체와 팹리스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 노력은 부족했다. 반도체 핵심 설비는 여전히 해외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ASML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연 매출 49억달러의 세계 2위 반도체 장비 업체로 `슈퍼 을`이라고 불린다. ASML이 공급하는 노광 장비가 없으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인텔 등 세계 굴지 반도체 업체조차 새로운 공장을 만들 수 없다.
ASML은 동반성장을 기반으로 커 온 회사다. 협력 업체가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고, 가치와 혁신을 높일 수 있도록 힘썼다. 핵심 부품 공급 업체를 1개만 선정해 5~10년간 장기 계약을 맺기도 했다. 자신들의 역량과 이익을 협력사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연구개발(R&D) 공동 투자로 위험 부담도 공유했다. 협력사와 상호신뢰 관계는 ASML이 반도체 업계에서 선두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ASML의 성공 스토리는 우리 반도체 업계에 신선한 귀감이 된다.
최근 국내 산업계는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이 화두다. 지난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은 수요 대기업과 1차 협력사 간 평면적 수준에 그쳤지만, 현 정부 정책은 수요 대기업과 2·3차 협력사까지 입체적 수준으로 발전됐다. 동반성장 정책은 독자 생존에만 의존하는 저(低)신뢰 사회를 동반 협력관계의 고(高) 신뢰 사회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대기업은 각종 투자 계획은 물론이고 2~3년 내 상용화가 가능한 첨단 기술에 대한 비전을 2·3차 협력사에까지 제시해야 한다. 대기업이 반도체 장비 국산화에 노력하면, 중소·중견 장비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대기업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대기업의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는 없다. 국내 반도체 장비·소재·부품 및 팹리스 기업들의 혁신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기업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 생존이 가능한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 내 경쟁은 점차 치열해지고 있다. 혼자서 빨리 가는 것보다 함께 멀리 가는 것이 우리 반도체 산업을 재도약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김형준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thinfil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