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26>남보다 앞선다는 것

혁신의 지리학을 잠시 생각해 보자. 한때 잘나가던 미니컴퓨터 기업은 미국 보스턴 근교에 있었다. 루트 128이라고 불리는, 보스턴을 에워싸듯 둘러쳐진 고속도로를 따라 난 곳이었다. 여기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기술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시장 변화를 놓치면서 명성은 퇴색한다.

당시 최고 기업 왕 연구소와 디지털 이큅먼트(DEC)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두 기업 모두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왕은 직원 3만2000명이 모두 떠나는 것을 목격했고, 시대를 앞서간 DEC도 컴팩에 인수돼 사라진다.

기업에 시장 변화만큼 기회와 위협이 교차하는 단어도 없다. 이 마켓 시프트를 놓친다는 건 종종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시장을 선도하던 디지털 기업들이 이걸 놓칠 수 있을까. 잘나가던 IBM과 왕 연구소를 경험한 누군가의 증언이라면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첫 번째 사실은 위대한 기업이라 해도 시장 변화를 놓치고 위험에 처한다는 점이다. IBM과 왕 연구소 설립자 왕안조차도 피할 수 없었다. IBM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미니컴퓨터, 왕은 미니컴퓨터에서 PC로의 시프트를 놓쳤다.

이들이 시장 변화를 모른 것도 아니었다. 단지 IBM과 왕 모두 자신의 근시안으로 시장을 해석했다. IBM에 미니컴퓨터란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축소 버전일 뿐이었다. 왕에게 개인용컴퓨터(PC)란 자신이 자랑하던 미니컴퓨터의 탁상용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실상 왕은 IBM이 PC를 내놓기 몇 해 전에 첫 PC 제품을 선보인다. 2200 PCS Ⅱ는 마이크로 프로세스를 채택한 최초의 PC였다. 슈가트가 제조한 5.25인치 플로피 드라이버를 갖춘 최초 제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왕에게 최고 제품은 언제나 미니컴퓨터였다.

소프트웨어(SW)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존 제품을 생각하다 보니 새 제품은 늘 필요 이상 복잡하기 마련이었다. 1988년에 서던캘리포니아대가 구입한 왕 프리스타일 시스템은 미니컴퓨터, 워크스테이션 30대, PC 25대, 레이저 프린터, 스캐너 5대에 8기가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로 구성됐다. 가격은 120만달러나 했다.

실상 이건 존 체임버스 시스코시스템스 회장의 고백이다. 체임버스 회장에겐 시장의 변화와 시프트가 누군가에겐 위협이고 다른 이에겐 기회다. 왕 연구소와 DEC, 거기에 컴팩과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몰락도 모두 시프트를 놓친 탓이라고 본다.

체임버스 회장의 조언은 이런 시프트를 포착하고 선도하라는 것이다. 실패한 기업과 시스코의 차이란 자기 자신의 와해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스코는 새 기술로 옮겨 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종종 수익이 나는 제품을 포기해야 했고, 앞서고 싶다면 기꺼이 뛰어넘기로 했다. 고객에게도 민감했다. 고속 이더넷이란 용어를 처음 들은 것도 실상 보잉과 포드에서였다. 와이파이로 넘어갈 땐 기업 인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앞선다는 것이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 테크 기업들의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실상 이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다음 번 시프트에도, 그다음 번 시프트에도.
문득 학창 시절에 들고 다니던 타임지를 자주 장식한, 양편이 동그랗게 마감된 푸른색 상자 바탕에 흰색으로 WANG이라 쓰여진 왕 연구소의 로고와 짙은 붉은색 네모 박스 위에 흰 글씨체로 'digital'을 한 자씩 새겨 넣은 DEC의 로고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26>남보다 앞선다는 것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