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력양성 시스템, '물'이 돼라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 신산업이 강력한 도전과 견제를 받고 있다. 주요 국가들이 안정적 제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반도체와 배터리의 글로벌 공급망 재조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중국은 최근 발표한 '2035년까지 장기 경제 계획'에서 반도체를 중점 투자 분야로 꼽았다. 미국은 반도체·배터리 분야 취약점 파악을 위한 공급망 조사에 돌입했다. 유럽도 2030년까지 180조원을 들여 유럽 내 전체 반도체 생산을 기존 대비 2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폭스바겐은 외부에서 공급받던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생산할 예정이다. 우리 제조업에는 모두 악재다.

거대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국가들을 제치고 미래 신산업에서 K-제조업 패권을 확고히 하는 지름길은 신산업 분야 전문인력을 선제 양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공계 인재 배출(공급) 속도가 신산업 성장(수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기업들은 기존 인력 중 일부를 전환 배치하거나 외부 기업과의 개방형 혁신을 추진, 발등의 불을 끄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최근 반도체 인력 양성을 주제로 업계 간담회를 개최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미래차, 시스템반도체 등 핵심 산업 전문인력 부족을 해결하려면 기술 인재 공급 및 인재 유치 방식이 더 유연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첫째 교육의 유연화다. 공학 교육 커리큘럼에 기업 참여도를 높이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술 트렌드에 맞춰 커리큘럼을 적절히 운용, 기업의 필요에 맞는 인재를 적시에 배출하는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 취업과 연계한 계약학과, 특화 전공 개설, 실습 중심 전문학사, 석·박사 양성 과정이 대표 사례다

둘째 채용의 유연화다. 전문성을 갖춘 신규 인력 채용이 곤란하다면 현장 인력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돼야 한다. 다른 업무에 종사하던 재직자나 퇴직자, 출산·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대상으로 직무를 재교육해서 채용하면 된다. 기업·대학 간 장벽을 낮춰 고용 유동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재외 한인 공학자를 유치하거나 대학교수를 기업으로 초빙해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는 방법도 있다.

셋째 인재 유치에 필요한 제반 투자도 유연해져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면 자연스레 밖으로 향하는 인재(brain drain)보다 들어오는 인재(brain gain)가 많아진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 대한 처우 개선은 물론 연구 환경, 정주 여건 개선을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이 매년 발간하는 세계 인재 순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우수한 교육 역량에 비해 생활비, 물가나 삶의 질, 미세먼지 대응이 하위권이다.

정부는 대학에 자율을 주되 환경 조성에 힘쓰고, 기업은 인재를 갖다 쓸 생각만 할 게 아니라 필요하면 직접 길러 쓰라는 제안이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동안의 정부 지원 방식과 기업 투자 방향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의 인력 양성 시스템은 '물'이 돼야 한다. 정해진 틀을 깨고 물처럼 유연하게,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시장 요구와 산업 변화에 맞게 어떤 모습으로든 변해야 한다. 그래야 한 명의 인재가 목마른 현장에 시원한 물 한 모금, 달콤한 단비가 될 수 있다. 급변하는 산업에 대응 가능하도록 기술 인력의 양성·활용·유치라는 3요소를 쇄신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글로벌 산업구조가 요동치는 지금이 기회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ycseok@kia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