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혁신의기술] 〈53〉한국 제조업, AI를 어떻게 내재화 할 것인가? (중)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

“완벽한 씨앗도 토양이 없으면 뿌리내리지 못한다.” 농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해온 말이다. 이 단순한 진리가 지금 한국 제조업의 인공지능(AI) 도입 현장에서 가장 절실한 교훈이 되고 있다. 지난 편에서 우리는 공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AI를 막는 세 개의 벽, 즉 인프라·데이터·인재의 문제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이 벽을 이미 넘은 기업들은 무엇을 다르게 했을까. 답은 하나였다. 기술보다 토양을 먼저 만들었다.

지멘스는 2000년대 중반부터 '엑셀러레이터(Xcelerator)'라는 플랫폼 하나로 설계와 제조 데이터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AI를 사서 공장에 붙인 것이 아니었다. 설계자의 도면과 생산 라인의 기계가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구조, 즉 데이터의 통로를 먼저 만들었다. 기술은 그 통로가 완성된 뒤에야 들어왔다. 덕분에 지멘스는 오전에 도면을 수정하면 오후 생산 라인이 자동으로 바뀌는 공장을 운영한다.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SW) 기업 IFS가 2025년 전 세계 제조업 리더 170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AI 성공에 실시간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답했지만 실제로 데이터 기반을 갖춘 기업은 23%에 그쳤다. 기술을 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 기술이 뿌리내릴 토양을 먼저 만드는 곳은 드물다.

한국에도 이 토양을 먼저 만든 기업이 있다. 포스코는 60년간 제철소에서 쌓아온 공정 데이터를 정보기술(IT) 시스템과 연결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새 솔루션을 사는 대신, 이미 현장에 있는 데이터를 꺼내 쓸 수 있는 구조부터 만들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까다로운 소량·맞춤 주문 처리 방식의 변화다. 철강 제품은 고객마다 요구하는 규격과 수량이 제각각이라, 담당자가 수많은 생산 제약 조건을 일일이 따져가며 주문별로 설계해야 한다. 포스코 발표에 따르면, 이 복잡한 주문 판단과 설계 작업에 평균 12시간이 걸리던 것이 AI 적용 후 1시간 이내로 단축됐다. 기술이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라, 60년의 현장 경험이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 위에 AI가 올라간 순서였다.

삼성전자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공정 전체를 한 번에 바꾸려 하지 않았다. 먼저 가장 복잡하고 병목이 심한 공정 하나를 골랐다. 반도체 회로의 미세한 왜곡을 보정하는 '리소그래피 시뮬레이션(Lithography Simulation)'이다. 이 단일 공정에 AI를 집중적으로 적용한 결과, 삼성전자와 엔비디아의 2025년 공동 발표에 따르면 시뮬레이션 속도가 기존 대비 20배 향상됐다. 한 공정의 완전한 성공이었다. 삼성전자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30년까지 전 세계 생산 공장을 'AI 자율 공장'으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선언했다. 새 기술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갤럭시 스마트폰 사업에서 쌓아온 AI 경험을 꺼내 제조 현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2015년부터 시작한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으로 2023년까지 전국 중소기업 3000여곳에 이 경험을 퍼뜨렸다.

돌아보면 세 기업은 같은 순서를 밟았다. △첫째, 새 기술을 사기 전에 이미 가진 것부터 꺼냈다. 포스코는 60년 제철 현장의 노하우를,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사업에서 쌓은 AI 경험을 가져왔다. 새것을 산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의 값어치를 다시 발견했다. △둘째, 전사 도입이 아닌 한 공정의 완전한 성공을 먼저 만들었다. 삼성전자가 리소그래피 한 공정에서 충분히 증명하고 나서야 다음 공정으로 나아간 것처럼, 작은 성공이 다음 확산의 근거가 됐다. △셋째, 기술을 현장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 있었다. 포스코가 AI를 학습시키기 위해 소량·맞춤 주문 처리에 영향을 주는 현장 인자 12개를 직접 도출한 것처럼, 현장의 문제를 데이터의 언어로 옮기는 '가교 인재'가 내재화의 실질적 주체였다.

결국 혁신의 기술은 최신 AI를 가장 먼저 도입하는 기술이 아니다. 우리 공장에 이미 있는 것을 꺼내어 데이터로 만들고, 그 데이터 위에 AI를 올릴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기술이다. 씨앗보다 밭이 먼저다.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