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쿠팡 세대'의 등장

박준호 플랫폼유통부 기자
<박준호 플랫폼유통부 기자>

“요새 아기들이 엄마, 아빠 다음으로 배우는 말이 쿠팡이라네요.” 최근 만난 스타트업 대표에게 국내 e커머스 시장 판도 변화에 대해 묻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엔 일상 깊숙이 침투한 쿠팡의 영향력과 경쟁사가 느끼는 위기의식을 명확히 꿰뚫었다.

쿠팡은 최근 몇 년 동안 라이프스타일을 가장 많이 바꾼 기업이다. 로켓배송으로 기저귀를 주문하고, 새벽배송으로 받은 식재료로 아이들 아침식사를 챙긴다. 이를 보고 경험하며 자란 아이에게는 쿠팡 서비스가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이들이 '쿠팡 세대'로 성장한다면 그때부터가 '레거시'(Legacy) 유통사의 진짜 위기다.

쿠팡 성장세는 변화를 두려워하던 유통 대기업의 혁신 의지에도 불을 붙였다. 신세계그룹은 이베이코리아 인수를 위해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투자를 감행했고, 네이버와 지분 혈맹도 맺었다. 롯데 역시 롯데온 수장을 교체하며 변화를 꾀했다. 그야말로 반격을 위한 숨 가쁜 한 해였다.

유통 대기업의 적극 행보 이면에는 아직 해볼 만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 유통업체 임원은 “국내 e커머스 시장에는 아직 지배 사업자가 없다. 쿠팡 점유율도 10%대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스코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더 많이 쌓아 온 고객 데이터, 기존 자산을 활용한 효율적 인프라 구축이 '역전의 열쇠'라고 자신했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쿠팡 경쟁력의 핵심은 자금력과 물류 인프라보다 '애자일'(Agile)한 조직 문화에 있다.

쿠팡은 내부 조직을 '프로덕트 오너'(PO) 중심의 소규모 단위로 운영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유동적으로 팀을 구성하고 해체한다. 대기업이 아니라 스타트업 방식 접근이다. 업계에서도 쿠팡 정도로 몸집이 커진 기업이 이 같은 경영 기조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는 반응이 나온다. 수평적 소통이 우선되고 직급과 위계가 없다 보니 우수한 개발 인력이 몰린다. 쿠팡을 유통기업이 아니라 테크기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취재차 만난 한 개발자는 “솔직히 말하면 개발자 입장에서 정보기술(IT) 기업이 아니라 유통기업 입사는 커리어 후퇴나 다름없다. 특별한 보상 없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라고 털어놨다. 유통 대기업이 개발 인력 확보에 열을 올리지만 우수 개발자 영입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경직된 조직문화, 온라인 사업과 맞지 않는 오프라인 중심의 직급제 등 때문이다.

쿠팡이 유통 대기업보다 앞서 나갈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민첩하고 유연한 실리콘밸리 문화에 있다. 쿠팡은 최근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일본과 대만에 퀵커머스 서비스까지 고작 6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일반 유통 대기업이었으면 1년은 더 걸렸을 일이다. 대기업이 계열사 간 시너지를 높이고 투자를 확대해도 인식의 근본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새해에도 유통사의 혁신 의지가 쿠팡세대의 등장을 막을 수 있을지, e커머스 시장을 둘러싼 경쟁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박준호기자 junh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