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인공지능(AI)·바이오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과학기술 인력난이 우리 국가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로 전략기술 분야 기술 자립과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수행할 과학 인재가 부족하다.
현장의 위기감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11월 한국은행이 국내 이공계 석·박사급 연구원 27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43%가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국내 최고 수준의 '두뇌'가 짐 쌀 준비를 하는 등 인재 유출이 현실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위기의식 속에 정부는 '과학기술 인재 확보 5개년 로드맵'에 따라 인재 양성·유입·정착까지 아우르는 전주기 지원체계 개편에 착수했다. 주요 내용은 △전략기술 분야 인재 집중 양성 △박사후연구원(포닥) 지원 확대 △산·학·연 연계 강화 △해외 우수 인재 유치 활성화 △이공계 진학 촉진 등이다. 특히 학부-대학원-포닥-중견연구자에 이르는 경력 단계별 맞춤 지원을 강화해 우수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를 지속할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정책 효과가 단기간에 가시화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 현장과 기업은 그 원인으로 '구조적 병목'을 꼽는다. 대학·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중심의 연구 생태계가 실제 산업 수요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경력 초기 연구자의 불안정한 고용 구조 역시 우수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거나 타 분야로 이탈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은 이미 첨단기술 인재 확보를 국가 전략으로 격상하고 자국 환경에 맞춘 생태계를 고도화한 지 오래다. 미국은 대학·기업·국립연구소 간 인력 순환 구조를 활성화하고, 전략기술 분야 박사급 인력에 파격적 처우를 제공한다. 독일은 응용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산업과 긴밀히 연결된 연구 생태계를 구축해 박사 인력이 자연스럽게 산업 현장으로 이동하도록 설계했다.
중국은 풍부한 인프라 및 투자와 더불어 상위 영재를 학부 단계부터 연구 현장에 투입하고 있으며, 일본은 반도체·AI 분야 특화 대학원 프로그램과 해외 연구자 유치 정책을 대폭 강화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산·학·연 인력 순환 △안정적 연구 경력 경로 보장 △국제 공동연구 기반 확대 △외국인 연구자 유입 제도 개선 등을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고려해 한국 또한 단편적 예산 지원이 아니라 구조 개편 차원의 접근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요국의 인재 양성 모델을 면밀히 분석해 국내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춘 정밀한 수요 예측과 유연한 인력 이동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근 독일 슈투트가르트대 교수는 “결국 R&D 경쟁력의 핵심은 예산 규모가 아니라 '사람'”이라며 “첨단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인재 확보 실패는 곧 국가 산업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희 기자 leeih@etnews.com, 김영준 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