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말기 당시 지도부의 쇄국 의지는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지 5년만인 1871년, 전국 200여곳의 교통 요충지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병인작 신미립(丙寅作 辛未立).' 병인년에 지은 결의를 5년이 지난 신미년에 비로소 새겼다는 이 짧은 문구는, 쇄국이 일시적 감정이 아닌 오랜 숙고 끝의 결단이었음을 말해준다.
서구 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만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굳게 걸어 잠근 빗장은 결국 우리를 세계사라는 무대 밖으로 내몰았고, 근대화의 결정적 시기마저 놓치게 만든 비극의 시작이 되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150여년이 흐른 오늘, 거대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문명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미 전 세계 산업 현장에서는 이를 통해 업무 생산성과 혁신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런데도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너나할 것 없이 범용 생성형 AI 서비스 접속을 원천 차단하는 디지털 장벽을 다시금 쌓아 올리고 있다. 보안 유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 대안으로 소형언어모델(sLLM) 구축에 눈을 돌린다. 내부의 민감한 정보와 핵심 자산의 외부 유출을 원천 차단한다는 관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위험이 존재한다. 바로 지능의 폐쇄성이다. sLLM은 조직 내부의 규정이나 과거 자료를 정리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그 지식의 범위는 결국 조직의 울타리 안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반면 LLM은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토대 위에, 전 세계 집단지성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며 압도적인 지능의 실체로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고 있다.
sLLM의 안전함에 안주한 채 이 거대한 흐름을 외면한다면, 한때 세계시장을 선도했으나 자국 생태계에 갇혀 글로벌 표준에서 도태된 일본 산업계의 전철을 밟으며 디지털 갈라파고스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이는 단순히 도구 하나를 못 쓰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조직 전체의 사고력과 혁신 역량이 낙오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의 모습이 마치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던 그때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가 철갑선과 전신을 앞세워 근대화의 파고를 넘을때, 성문을 굳게 닫았던 조선의 선택이 결국 국력의 쇠락을 넘어 주권 상실이라는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졌던 역사를,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무조건적인 금지가 가져올 더 큰 위험은 음지화에 있다. 공식적인 통로를 막는다고 해서 기술에 대한 현장의 갈증까지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른바 '섀도 IT', 즉 보안망 밖의 개인 기기와 외부 네트워크를 통해 업무 자료가 오가는 현상만 부추겨 유출이 발생해도 그 사실조차 파악할 수 없는 보안의 사각지대를 만들 수 있다.
마치 조선 시대에 공식 무역을 금지하자 밀무역이 성행해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거래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통제 불가능한 통로를 통해 조직의 소중한 자산이 오히려 더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진정한 보안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관리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생성형 AI가 연구개발자의 고유한 통찰과 창의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AI를 활용하는 개발자와 활용하지 않는 개발자의 속도와 결과물의 질적 격차는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과거 우리가 증기기관차를 낯선 괴물로 여기며 멀리할 때, 세계는 대륙을 횡단하며 근대화를 이뤘다. 지금 우리가 AI를 위협으로만 간주해 격리한다면, 미래 세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쇄국의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보안은 혁신을 가로막는 방파제가 아니라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안전장치가 돼야 한다. AI가 촉발한 미증유의 변혁이 제5차, 제6차 산업혁명을 견인할 수 있도록, 이제 21세기 디지털 척화비를 허물고 AI 개항을 통해 지능의 대항해를 시작해야 할 때다.
이용식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한국전자파학회 대외협력부 상임이사 yongshik.lee@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