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이상 수입에 의존하는 전력반도체를 국산화하는 '차세대 전력반도체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정부가 국비 5000억원을 투입한다. 2026년을 8인치 양산 체제 전환의 골든타임으로 규정, 수요 기업이 직접 기획하고 상용화까지 책임지는 파격적인 수요자 주도형 R&D 모델을 도입한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달 '차세대 전력반도체 산업 육성 로드맵' 실행을 위한 수요기업 조사에 착수한다. 정부가 5000억원을 출자하고 민간 매칭 자금까지 최대 7500억원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가 본격화한다.
차세대 전력반도체는 기존 실리콘(Si) 기반 반도체보다 고온·고전압·고주파 환경에서 성능이 우수한 탄화규소(SiC), 질화갈륨(GaN) 등 화합물 소재를 활용한 반도체다. 국방이나 전기차, 전력망 구성의 핵심 부품이기 때문에 국가 산업의 '생명선'으로 묘사된다. 국내 산업계는 자체 생산·공급 능력이 부족해 전력반도체 수요분 90~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2026년 인프라 구축 준비를 시작으로 2027년에는 1.2kV급 'SiC 모스펫(MOSFET)' 등 핵심 소자 양산에 돌입한다는 구체적인 타임라인을 설정했다. 2030년까지 전력반도체 기술자립률과 국내 생산 비중을 현재 대비 2배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8인치 공공팹 기반 구축을 완료해 민간 파운드리로의 기술 이전을 가속할 방침이다. 현재 전력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 기반으로 8인치 양산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고 단가를 낮출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공급자(반도체 제조사) 중심 기존 R&D 체계에서 벗어나, 제품을 실제로 사용하는 '수요 기업'이 기획을 주도하는 방식이다. 수요기업과 팹리스, 파운드리가 컨소시엄으로 묶인 'K-온디바이스 AI 반도체 기술개발 사업' 모델을 일부 벤치마킹해 이식한다.
이 모델의 특징은 개발한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외면받을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는 점이다.
각 산업 분야를 대표하는 앵커 기업(수요 기업)이 총괄 연구를 주관한다. 파악된 수요에 따라 소재-소자-모듈-시스템으로 이어지는 밸류체인 참여 기업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고, 분야별 앵커기업이 해당 과제의 총괄 주관 기관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 기술 개발을 넘어 소재부터 시스템 실증에 이르는 전 과정을 관리하며 최종 제품의 상용화까지 책임지는 구조다.
수요 분야는 에너지그리드, AI 인프라, e-모빌리티, 친환경 선박, 국방·항공 등이다. 삼성전자, 현대모비스, 한국전력공사 등이 각 분야 앵커기업 후보로 거론된다. 후보기업이 다수일 경우 △전 주기 컨소시엄 구성 능력 및 리더십 △실질적인 상용화 책임 및 구매 의지 △글로벌 경쟁력 및 경제적 파급 효과 등이 고려해 선별할 방침이다.
산업부는 프로젝트를 위해 '차세대 전력반도체 추진단(단장 구상모 광운대 교수)' 내에 소재·소자·모듈·IC·실증시스템 등 밸류체인별 핵심기업, 참여기업 및 관련 기관 전문가로 구성된 분과를 운영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력반도체 분야 글로벌 경쟁자들은 이미 성숙기에 들어섰고, 중국 기업도 이미 주요 기술 분야에서 상당히 따라 잡았지만 우리나라는 쓸 수 있는 전력반도체 칩이 너무 없다”며 “정부 중심으로 생태계 활성화가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형두 기자 dud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