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AI와 함께 열어가는 의약품 신속 허가

'의료제품 허가·심사 혁신방안' 주요 내용(자료=식품의약품안전처)
'의료제품 허가·심사 혁신방안' 주요 내용(자료=식품의약품안전처)

희귀·난치병 환자에게 신약은 단순한 치료제가 아니라 '내일'을 꿈꾸게 하는 희망이다. 하지만 환자 손에 쥐어지기까지 안전성과 유효성 입증에 넘어야 할 허들은 높기만 하다. 한 개의 신약을 허가받기 위해 제출되는 서류는 최대 50만쪽, 아파트 15층 높이에 달한다. 1분 1초가 절박한 환자들과 혁신 신약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업에 방대한 데이터 검토에 걸리는 시간은 긴 기다림이자 혁신을 가로막는 문턱으로 느껴지고 있다.

초격차 기술 경쟁이 숨 가쁘게 벌어지는 혁신의 현장에서, 규제기관 역할이 더 이상 수동적인 서류 검토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이미 글로벌 규제기관들은 '지체의 장벽'을 깨기 위해 인공지능(AI)을 전격 도입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5월 생성형 AI 도구인 '엘사(Elsa)'를 기관 전반에 도입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또한 방대한 데이터를 꼼꼼하면서도 신속하게 분석하는 AI 기술을 도입해 오래 걸리는 허가·심사 속도를 높이고, K바이오가 글로벌 시장을 선점할 수 있도록 혁신에 앞장서고 있다.

식약처는 지난 2월 AI 프로젝트를 전담할 '식의약 인공지능 전환 추진단(AX 추진단)'을 신설해 첨단 기술이 일으키는 규제 패러다임 대전환의 파고를 선제적으로 넘고 있다. AX 추진단은 단순히 기존 수기 업무를 디지털화하는 전산 고도화 차원을 넘어 식의약 행정 전반의 AI 대전환을 실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AI를 행정 보조 수단이 아니라 규제과학의 핵심 인프라로 안착시켜 행정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 변화의 출발이 '의약품 AI 심사 보조 시스템'이다.

AI 심사 시스템의 핵심 엔진은 전문적인 의약품 영역에 특화된 AI 모델에 있다. 식약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심사에서 최고점을 획득한 '엑사원'을 기반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의약품 전문 지식과 복잡한 규제 프로세스를 학습한 '똑똑한 AI 심사 도구'가 2028년까지 순차적으로 완성되면 허가·심사 전 과정을 촘촘하게 지원하게 된다.

먼저 기업이 허가·심사 신청 서류를 제출하기 전 필수 데이터의 누락이나 형식적 오류를 실시간으로 잡아내는 'AI 자가 검증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서류 미비로 인한 보완 지시 등 기업이 겪어야 했던 불필요한 시행착오가 줄어들 것이다.

서류가 정식 접수된 후에는 AI가 방대한 제출자료를 번역하고 요약하며 검토서 초안을 자동으로 작성해 허가·심사 전 과정을 지원한다. 심사관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사결정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어 한층 더 면밀하면서도 빠른 심사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는 신약 품질 평가자료부터 AI 심사 기준을 마련해 10월부터 AI 심사 지원 서비스를 시작한다. 내년에는 위해성 관리계획, 2028년에는 안전성·유효성, 임상 등까지 신약 전체 범위를 AI가 심사를 보조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그러나 신약 허가 기간을 세계 최단 수준인 '240일'로 단축하는 혁신은 단순히 AI 전환 하나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무리 우수한 내비게이션과 고속도로가 있어도 운전자 숙련도와 차량 성능이 받쳐주지 못하면 속도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첨단 기술이라는 강력한 무기에 이를 능숙하게 다루고 면밀하게 판단할 전문 인력, 그리고 유연한 제도의 혁신이 맞물려야 비로소 가시적인 시너지가 창출된다. 기술과 인간, 그리고 제도의 조화로운 융합이 결합할 때 혁신의 바퀴가 온전하게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식약처는 AI 심사 보조 시스템 구축과 동시에 대대적인 전문 인력 확충, 제도적 변화에도 나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대통령 주재 '제2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 후속 조치로, 역대 최대 규모인 195명의 전문 심사 인력을 신규 채용했다. 이어 현장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 '의료제품 허가·심사 혁신방안'을 마련하고 6월 1일부터 본격 시행했다. 확충된 허가·심사 전문 인력을 기반으로 서류 준비부터 심사 완료까지 전 주기 규제지원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먼저 제조·품질, 임상시험 등 필수 요건을 담은 '허가·심사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허가 신청 전 대면회의(Pre-NDA 미팅)'로 예상되는 지연 요인을 사전에 상담하고 해소한다. 허가 신청 후에는 순차적 검토 방식에서 벗어나 분야별 전담팀이 동시·병렬로 검토하는 심사 체계를 도입했고, 이를 AI 심사 시스템에도 접목시켜 심사 속도와 효율을 극대화할 계획이다.

AI가 수십만쪽의 서류를 신속 분석해 검토서 초안을 지원하면 숙련된 심사관들이 검토서를 작성하는 지능형 협업체계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AI 기술, 전문 역량을 갖춘 인력, 그리고 제도의 혁신이 촘촘하게 맞물릴 때 평균 420일이 걸리던 신약 허가는 안전성은 더 꼼꼼하게 검증하면서도 속도는 240일로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오랫동안 애타는 마음으로 신약을 기다려왔던 환자분들은 안전하고 효과적인 신약을 빠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기업은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서 선도자로서 시장 선점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식약처의 AI 대전환 프로젝트는 의약품 분야 허가·심사 혁신을 넘어 식품 안전 분야에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AI 기반 식품정보시스템 통합이 완성되면 국민께서 맞춤형 식생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고, 기업은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상담을 받을 수 있으며, 정부도 AI로 정밀하게 산출한 과학적 위험도를 토대로 촘촘한 안전관리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 물밑에서 쉼 없이 갈퀴질을 멈추지 않는 백조처럼 식약처는 국민의 안심이 일상이 되고 우리 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혁신의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AI 기술과 전문 인력, 제도 혁신으로 닦아놓은 지능형 고속도로 위에서 K식의약 산업이 힘차게 질주해 글로벌 선도자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식약처는 규제 서비스 기관으로서 든든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필자〉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학계와 기업을 두루 거친 약학·바이오 전문가다. 1965년생으로 서울대 약학대학 학사·석사, 미국 뉴욕주립대학 이학박사(약제학과) 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 보령제약 개발부, 1994년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세포생물학과 연구원, 1996년 SK케미칼 생명과학 연구개발실 연구원 등으로 근무했다. 이후 1997년 특허청 심사관, 1999년 차의과대학교 의예과장, 2005년 고려대 생명과학대학 교수를 거쳐 2009년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제29대 서울대 약학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2022년 제38대 한국약제학회 회장과 제7대 한국약학교육협의회 이사장을 지냈다. 2022년 5월부터 식약처장으로 재임하며 규제지원 기관으로 탈바꿈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