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장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처럼 보인다. 어제까지 잘 돌던 모터가 멈추고, 정상처럼 보이던 베어링이 깨지고, 별문제 없어 보이던 설비가 생산 중에 멈춰 선다. 흔히 “갑자기 고장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설비 고장이 정말 갑자기 생기는 것일까?
소리의 결이 달라지고, 진동의 패턴이 흔들리고, 온도와 전류의 흐름이 미세하게 어긋나는 시간이 먼저 있다. 고장은 사건이지만, 그 앞에는 대개 상태의 변화가 있다. 또한 모든 설비가 같은 속도로 노후화되지는 않는다. 같은 부품이라도 하중, 온도, 윤활, 작업 조건에 따라 상태 변화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부품은 아직 멀쩡한데 너무 일찍 교체되고, 어떤 부품은 정기 점검 전에 이미 한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상태기반정비, 즉 CBM(Condition-Based Maintenance)이다. CBM은 고장이 난 뒤 고치는 방식도, 시간표에 맞춰 교체하는 방식도 아니다. 설비의 실제 상태를 보고 정비 시점과 조치 수준을 판단하자는 접근이다. 말하자면 “언제 고장 날 것인가”를 막연히 맞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설비가 어떤 상태인가”를 계속 읽어내는 일에 가깝다.
이제 CBM은 단순히 상태를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 설비 가까이에서 먼저 읽고 필요한 순간 판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CBM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이유
CBM과 예지보전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기관에 따르면2025년 142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2033년 981억 달러(CAGR 27.3%)에 이를 것으로 제시된다. 설비를 멈춘 뒤 고치는 시대에서, 멈추기 전에 상태를 읽고 대응하는 시대로 유지보수의 기준이 옮겨가고 있다.
이 시장이 커지는 이유는 단순히 AI 기술이 좋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센서와 통신, 데이터 분석 기술이 성숙한 것도 배경이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제조 현장의 운영 조건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설비는 점점 복잡해지고, 납기와 품질 요구는 높아지며, 숙련 정비 인력 확보는 어려워지고 있다. 설비 한 대가 멈췄을 때 발생하는 손실도 예전보다 커졌다. 특히 철도, 발전, 제철, 항만, 화학, 반도체, 자동차처럼 설비 중단이 곧 생산 손실과 안전 문제로 이어지는 산업에서는 정비 방식 자체가 경쟁력이 된다. 이제 유지보수는 단순한 비용 항목이 아니라, 생산성과 안전을 동시에 좌우하는 운영 전략이 되고 있다.
현장에서 CBM의 가치는 조금 더 현실적이다. CBM은 고장을 신비롭게 예언하는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설비가 멈추기 전에 판단할 시간을 벌어주는 기술에 가깝다. 지금은 계속 운전해도 되는지, 감속 운전이 필요한지, 다음 정비 때까지 버틸 수 있는지, 즉시 점검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필자가 고속열차용 CBM 시스템을 양산 납품하면서 확인한 것도 이 지점이다. 고속열차의 부품은 운행 중에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작은 이상이 큰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때 CBM은 단순히 데이터를 쌓는 장치가 아니라, 정비 판단의 시간을 앞당기는 구조가 된다. 운행 중 상태를 읽고, 이상 징후를 조기에 확인하고, 정비 시점과 조치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CBM의 본질은 설비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고,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국내외에서도 CBM과 AI 판단을 결합하려는 연구와 적용이 활발해지고 있다.
알고리즘보다 먼저 필요한 것
최근 CBM은 AI와 결합되며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다. 진동 데이터를 학습해 베어링 이상을 찾고, 전류 파형에서 모터 상태를 추정하며, 열화상 이미지로 과열 부위를 감지하는 방식이 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CBM을 적용해 보면, 더 좋은 모델보다 먼저 따져야 할 문제가 있다. 더 근본적인 개선점은 감각의 위치와 품질에 있다.
지금까지의 CBM은 대체로 사람이 관리하기 쉬운 위치에서 출발했다. 센서는 설치하기 쉬운 곳, 배선하기 쉬운 곳, 유지보수하기 쉬운 곳, 기존 제어반과 연결하기 쉬운 곳에 붙는다. 그것은 틀린 방식이 아니다. 사람이 보고 관리해야 하는 시대에는 그 위치가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AI가 판단해야 하는 시대에도 그 위치가 항상 최선인가 하는 점이다.
고장의 징후는 사람이 관리하기 쉬운 위치보다, 실제 물리적 변화가 시작되는 작용점 가까이에서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베어링의 미세 손상은 베어링 가까이에서, 용접 품질의 변화는 용접 순간의 전류와 압력 변화에서, 공구 마모는 절삭이 일어나는 지점의 힘과 진동에서 더 빨리 드러난다. 사람이 보기 좋은 위치와 AI가 원인을 구분하기 좋은 위치는 다를 수 있다.
그래서 CBM에도 작용점 전환이 필요하다. 센서를 많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태 변화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위치와 시간축으로 감각의 기준을 옮기는 일이다. 예를 들어 모터 상태를 알고 싶을 때 제어반의 전류값만 보는 방식은 관리에는 편리하다. 그러나 베어링이나 감속기의 초기 이상까지 세밀하게 보려면 진동, 음향, 온도, 전류의 미세한 변화가 설비 가까이에서 함께 읽혀야 할 수 있다. 작용점에 가까워질수록 데이터는 더 민감해지고, 그만큼 원시 데이터를 모두 중앙으로 보내 판단하는 방식은 부담이 커진다.
작용점 전환이 만드는 나비효과
쉬운 예로 자동차를 생각해볼 수 있다. 바퀴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진동과 압력 변화를 중앙 서버로 보낸 뒤 브레이크 상태를 판단한다면 반응은 늦어진다. 실제 차량은 바퀴 가까이의 센서와 제어장치가 먼저 상태를 읽고, 필요한 순간 즉시 반응한다. 중앙 시스템은 장기적인 이상 추세와 원인을 분석할 수 있지만, 첫 판단은 작용점 가까이에서 일어나야 한다.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다. 모터, 베어링, 감속기, 펌프, 압축기, 용접기, 크레인처럼 상태 변화가 빠르게 발생하는 설비에서는 작용점 가까이에서 특징값을 먼저 계산하고, 정상 흐름과 다른 변화를 1차로 구분하는 구조가 유리하다. 모든 데이터를 중앙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먼저 정리하고 필요한 것만 보내는 방식이다. 이것이 온디바이스 CBM의 가능성이다.
![[오재근의 감각지능] 디지털반사신경망(하), 고장 예언보다 중요한 판단의 시간](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6/06/19/news-p.v1.20260619.601b974d6f134066bd8f54e4966582a4_P1.png)
“설비 가까이에 있는 장치가 먼저 진동, 온도, 전류, 음향 등에서 상태 판단에 필요한 특징을 추출하고, 정상과 다른 변화를 1차로 구분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정상 상태에서는 불필요한 데이터 전송을 줄이고, 이상 징후가 나타날 때는 중앙에 더 의미 있는 정보를 보낸다. 중앙 AI는 모든 원시 데이터를 확인하느라 자원을 쓰기보다, 말단에서 정리된 상태 정보를 바탕으로 더 깊은 원인 분석과 장기 추세 판단에 집중할 수 있다.
이 구조는 고속열차 CBM 같은 분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현재의 CBM이 운행 중 상태 데이터를 취득하고 중앙에서 분석하는 체계라면, 향후에는 작용점 가까이에서 1차 상태판단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중앙 판단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앙 AI의 판단 정확도는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 중앙으로 올라오는 정보가 무차별적인 원시 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에서 먼저 정리된 상태 정보와 특징값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 스트림을 계속 전송해야 하는 부담도 줄어든다. 정상 데이터를 계속 말하는 센서보다, 필요한 순간 의미 있는 상태만 말하는 센서가 더 유용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센서는 말을 줄일수록 시장이 된다.
말단 지능을 모아서 디지털반사신경망으로
이제 산업 AI뿐 아니라 AI 연동형 CBM은 중앙 지능과 역할을 분담하는 말단지능 체계로 발전할 것이고, 이러한 기조는 이미 온디바이스 AI의 담론 속에서 많이 나타난다. 실제 공장은 하나의 모터, 하나의 베어링, 하나의 센서로 움직이지 않는다. 모터의 전류 변화는 부하 조건과 연결되고, 베어링 진동은 윤활 상태와 연결되며, 온도 상승은 주변 환경과 운전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고속열차의 경우에도 개별 부품의 상태는 운행 조건, 하중, 속도, 진동 환경, 정비 이력과 함께 해석되어야 한다. 설비 상태는 개별 장치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공정과 설비와 사람의 조치가 서로 연결된 흐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온디바이스 AI는 가능성의 출발점이지, 전체 해답은 아니다. 설비 가까이에서 먼저 판단하는 작은 지능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으면, 현장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알람으로 쪼개질 뿐이다. 반대로 이 판단들이 중앙 지능과 역할을 나누고, 설비 간 상태를 연결하며, 사람의 조치 기준까지 반영할 수 있다면 공장은 단순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넘어 하나의 산업용 신경계에 가까워진다.
CBM은 고장을 예언하는 기술이 아니라, 설비가 멈추기 전에 판단할 시간을 벌어주는 기술이다. 그런데 상태 변화가 시작되는 작용점 가까이로 감각을 옮기는 순간, 판단도 설비 가까이로 내려와야 한다. 문제는 그 판단이 설비마다 흩어진 작은 알람으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말단에서의 1차 판단이 중앙 AI와 역할을 나누고, 공장과 시스템 전체의 상태판단으로 이어질 때 CBM은 단순한 유지보전 기술을 넘어 산업용 신경계에 가까워진다. 디지털반사신경망(DRN)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