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제조 능력'에서 '전력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진단이 나왔다. 세계 각국이 공장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국가만이 차세대 제조업을 선점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IEA는 최근 발표한 '무역과 산업정책의 역동적 시대, 에너지 기술 제조업 재균형' 보고서를 통해 청정에너지 기술 제조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평가했다.
태양광과 배터리, 전기차 등 에너지 기술 제조업이 여전히 글로벌 공급망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유럽연합(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등 각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며 생산기지와 공급망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IEA는 관세나 산업보호 정책만으로 제조 경쟁력이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은 생산원가뿐 아니라 전력 공급 안정성, 송배전망, 원자재 조달, 물류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투자처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배터리 공장, 수전해 수소 생산시설 등 전력 다소비 산업이 급증하면서 국가 경쟁력의 핵심도 '공장을 얼마나 많이 짓느냐'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IEA는 전력망과 발전설비 확충이 제조 경쟁력 확보의 전제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송전망 투자, 계통 안정성 확보, 유연한 전력시장 구축이 병행되지 않으면 대규모 제조시설 유치에도 한계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태양광과 배터리, 전기차 등 대부분 청정에너지 제조 분야에서 세계 최대 생산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의 관세 강화 이후에는 수출 시장을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등 신흥국으로 빠르게 다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IEA는 각국이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지나친 보호무역보다 안정적인 전력 인프라와 제조 경쟁력 확보가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생산기지 다변화와 핵심광물 확보, 국제 협력, 전력 인프라 투자가 함께 이뤄져야 공급망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분석은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반도체 메가프로젝트와 AI 데이터센터 확충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면서 대규모 송전망 확충과 전력계통 보강을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민 수용성 제고를 위한 송전선로 지중화 확대와 철탑 축소 방안도 내놓으며 전력망 구축 속도전에 나섰다.
이준희 기자 jh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