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벤처 불모지로 여겨졌던 국내 스타트업 마른 땅에 한줄기 단비를 뿌려 주던 기업이 있다. 바로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다.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붕괴 이후 다른 벤처캐피탈(VC) 투자자가 기업공개(IPO) 직전 회사에만 투자해 단기 이익을 실현하던 시점에 소프트뱅크는 `리트머스 프로젝트`라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척박한 땅에 물을 주자 조금씩 새싹이 텄고 이제는 물 주는 데 동참한 엔젤 투자자도 대폭 늘었다. 한국 엔젤투자 문화를 선두에서 이끌어 온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문규학 사장을 허운나 스타트업 포럼 이사장이 만났다.
-허운나 스타트업포럼 이사장=그동안 스타트업 회사에 꾸준하게 투자해 온 회사가 국내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는 지속적으로 스타트업 투자를 해 왔다. 어떤 이유로 남들이 꺼려하는 스타트업 투자를 지속한 건지.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사장=닷컴 버블 붕괴 후 1~2년간 힘들었다. 그 후로는 지속적으로 투자 해왔다. 벤처캐피탈(VC)이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주체는 아니다. 엔젤 투자자가 하는데 우리가 거기까지 내려갔다. 초기 기업에 투자하면 회수가 어렵고 오래 걸리니까 펀드 수익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5~6년 정도 초기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니까 어느 순간엔가 `초기 기업투자 열심히 하는 VC`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듣기에는 좋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방금 전에 투자한 지 9년째 되는 기업 대표가 왔다. 당시에는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중년이 됐다. 중요한 건 언제 성공하느냐는 아닌 것 같다. 성공할 때까지 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투자하는 거다. 기업 하시는 분들도 끈기 있게 성공할 때까지 하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허운나=일전에 “`스타트`는 있어도 `업`은 없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최근 스타트업 시장 동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문규학=2000년 전후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빠져 나오는 출구로 벤처 투자에 신경을 썼다. 그 때 닷컴 버블을 안 맞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태계 맹아가 생기려고 하던 시기에 완전히 붕괴됐다. 이를 빗댄 말로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정부·언론이 받쳐주니까 붐이 생기다가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붕괴됐다. VC는 투자를 받아서 펀드를 운용하는 주체인데 돈줄이 막혀버리니 하고 싶어도 못 했다.
미국에서는 `웹2.0` 화두로 회복기가 있었고 구글·페이스북 등이 등장했지만 한국은 이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10년 정도 암흑기가 있었다. 2009년부터 비로소 다시 노력해야겠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었다. 대기업·재벌 중심 경제구조로는 국가 경제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제 `업`도 이끌어 내는 상태가 됐다고 본다.
-허운나=그래도 아직 투자 환경이 척박하다는 사람이 많다. 뭐가 바뀌었고 어떤 게 더 변해야 하는지.
▲문규학=지난 5년 사이에 창업투자사 50%가 바뀌었다. 그만큼 치열하다. 하지만 적어도 기관 투자자가 벤처조합에 돈을 대주고 창투사가 이를 잘 운용해서 회수하는 돈의 흐름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됐다. 미비한 건 `회수(EXIT)` 시장이다. 미국은 회수 시장 70%가 인수·합병(M&A), 30%가 기업공개(IPO)다. 한국은 M&A가 10% 채 안 되고 대부분 IPO로 회수한다. 그런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코스닥시장 지수는 500선을 오르내리며 변동이 없다. 회수가 잘 안 된다는 얘기다. 공정거래위원회·동반성자위원회 등에서 규제 정책 펴고 제재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작은 기업 M&A하면 세제 혜택을 주고 기업이 경험할 수 있는 이득을 주는 등 인센티브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대기업도 M&A를 많이 시도하리라 본다. 한국 기업가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미국은 기업을 사고팔 수 있는 물적 대상 즉 상품으로 보는 반면 한국 기업가는 자식처럼 생각한다.
-허운나=그동안 창업 생태계 관한 발언을 많이 해왔다. 이상적인 생태계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문규학=두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구조다. 벤처 생태계 가장 모범은 미국 실리콘밸리라고 본다. 벤처의 구성 요소는 돈·사람·아이디어나 기술이다. 실리콘밸리는 훌륭한 교육 받은 사람이 모여 있고 거기에 돈이 쏠리고, 기술이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내는 선순환 작용을 한다. 미국 사람이 줄어드니까 인도·중국·한국 사람이 가서 힘을 보탠다.
또 하나는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 정부가 주도한 생태계는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정부 지원이 끊어지면 자생력을 잃는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정부가 만든 게 아니라 산업의 주요 리더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은 이제 시작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2000년 이전 벤처 1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NHN·넥슨·다음 같은 벤처 2세대는 여전히 남아 있고 조금 길게 갈 것 같다. 이 세대가 만들어낸 부가 시가 총액으로 따져 보니까 35조 정도 된다. 합하면 우리나라에서 시총 30위 정도 된다. 한 기업이 만든 건 아니지만 한국 벤처 생태계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의 물적 토대 위에 질적인 변화를 하는 지금이 3세대라고 볼 수 있다. 산업 틀이 갖춰지려면 한 세대가 지나가야 하는 것 같다.
-허운나=스타트업 본 투 글로벌(Born to Global) 시대다. 이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지.
▲문규학=벤처 3세대 특징 중 하나가 글로벌 시장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나오는 서비스는 출시 될 때부터 여러가지 언어가 동시에 지원된다. 페이스북·트위터는 한국 지사가 없는데 몇 백만명이 쓴다. 웹에서 모바일로 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이동하면서 글로벌 서비스는 이제 필수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세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 미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이 10만명 가량 된다고 한다.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틀이 벤처 생태계다. 글로벌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벤처기업이 활용하면 된다. 한국 벤처들은 외국인을 고용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중국 스타트업들은 유럽·미국 친구들과 공동창업을 많이 한다.
정부도 이걸 도와야 한다. 해외 인력이 비자를 못 받아서 못 온다고 한다. 이렇게 막아 버리면 한국에서 일 할 의지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허운나=한국 벤처 업계에는 `실리콘밸리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그걸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규학=실리콘밸리는 동경의 대상이다. 몰락해가는 미국의 금융 자본주의를 되살릴 유일한 불씨는 실리콘밸리에 있다. 혁신, 새로운 도전이 여전히 유의미한 산업 영역이 정보기술(IT)이다. 실리콘밸리는 50년에 걸쳐 이런 환경이 조성됐다. 그런데 인적 클러스트나 적절한 환경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집적만 시키려 하다 보니 서울에서 제일 비싼 땅인 테헤란로에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됐다. 젊은 기업가한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실리콘밸리 진출”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곳에서 무엇을 할지 물어보면 그건 “모르겠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데 단순히 동경하는 것도 문제다.
구로디지털밸리가 한국식 벤처 생태계의 하나의 대안으로 보인다. 스탠퍼드·버클리는 없지만 인적자원이 풍부하고 굉장히 싼 사무실 공간들이 있었다. 실리콘밸리를 마냥 따라하기보다는 우리식 벤처 모델, 생태계, 발전을 고민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좋은 예가 온라인 게임이다. 지난 2~3년간 한국에 등장한 소셜 관련 서비스는 모두 미국에서 배워 온 것이다. 앞선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아이템을 판매해서 수익을 올리는 무료 온라인 게임 모델은 한국이 최초로 개발했다. 몇 조원 시장을 만들어 내고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자신이 없으니까 자꾸 실리콘밸리를 기웃거리면서 그 곳에서 성공한 걸 가져와서 하려고 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최초`가 성공의 보증 수표는 될 수 없다고 본다.
-허운나=투자를 결정할 때 주로 보는 조건은.
▲문규학=사람에 대한 평가가 가장 크다. 사람 50%, 시장 성장성 30% 기술이나 아이디어 20%가 기본적인 조건이다. 학벌을 보고 투자하는 건 위험한 것 같다. 학벌로 투자하면 우리나라 최고 부자는 다 서울대 출신이어야 한다. VC는 스스로 점쟁이라고 한다. 심상을 본다. 쉽게 좌절할 친구인지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협의 과정에서 부단하게 스트레스를 주고 반응을 살핀다. 사실 굉장히 주관적이라 딱 잘라 정리는 안 된다.
-허운나=본인이 생각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문규학=굉장히 모호한 주제다. 기업하고 있는 사람은 나름의 기업가 정신을 갖고 있다. 도전하는 정신,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열정을 관리하는 능력을 갖추면 된다고 본다. 열정을 관리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차분하게 가야 할 때가 있는데 뜨겁기만 한 경우가 많다.
-허운나=투자를 바라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경고나 희망의 메시지가 있는지.
▲문규학=사업 모델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 생태계에 머물러 있어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있어야 생태계가 이어진다. 너무 쉽게 좌절하지 말고 가시덤불에 찔리더라도 너무 아파하지 말라. 애원하는 바다.
-허운나=때가 때이니만큼 거버넌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차기 정부에 IT산업 부흥을 위해 어떤 과제를 기대를 하는지.
▲문규학=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정보통신부가 필요한 시기에 한국에 정통부가 있었다. 정통부 역할이 1990년대와 2013년 이후는 달라야 하지만 컨트롤타워는 필요하다고 본다. 기술·정보·통신을 총괄하는 정부의 중재 기능은 반드시 필요하다. 산업에 복잡도가 심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생기고 갈등이 생길지, 이걸 조율해 줄 조직이 필요하다. 예전 `브로드밴드 강국` 등 모토를 내세울 필요는 없다고 보고 로드맵 중심 정책 구사도 위험하다고 본다.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장기 로드맵을 그리기 보다는 모든 산업군에서 갈등이 생길 때 이럴 조정해주는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허운나=정부나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문규학=벤처는 엘리트 비즈니스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엘리트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 정부도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지원하려고 하면 국가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평등 원칙에 어긋난다고 본다. 농사짓거나 소상공인 하다가 망하면 지원이 없는데 벤처 기업가가 망하면 지원해야 한다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냉정하게 보고 쏠림 현상은 없었으면 좋겠다. 배려 해주되 너무 간섭도 안 했으면 좋겠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