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플랫폼은 국력이다:디지털 시대 한국의 생존 방정식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장

2025년 현재,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디지털 기술을 둘러싼 세계질서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국제정치의 권력 재편과 직결되는 '디지털 생태계 경쟁'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 중심 디지털 생태계를 설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방국과 공동 번영은 물론 전략적 배제를 실행하고 있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의 인공지능(AI) 데이터 거버넌스 전략은 기술이 경제 질서와 안보 패러다임을 동시에 재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계속 조용하면서 발빠른 수용자일 것인가

한국은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디지털 인프라를 갖춘 국가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AI 학습 데이터의 양과 질, 자국 클라우드 생태계, 글로벌 플랫폼 기업 보유 여부 등을 종합해 보면, 글로벌 디지털 패권 경쟁의 '설계자'라기보다는 '참여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지난 20여년간 미국과 중국 주도의 글로벌 인터넷 경쟁에서 특히 우리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자국 플랫폼이 국내시장에서 선전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 테크기업(GAFAM)이나 중국의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BAT)에 비하면 글로벌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세계시장의 60%와 35% 이상을 점유하는 반면 우리는 나머지 시장의 2%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묘하게도 세계의 정치·경제·사회적 영향력 등을 비교하면 대략 이 수치는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 2%대의 영향력에 만족할 것인가. 그나마 그 2%도 우리가 독자적인 기술이나 서비스를 출시해 세계를 주도한 것은 아니고 미국과 중국 특히 미국의 앞선 기술과 서비스를 재빨리 현지화한 소위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따라온 측면이 있다. 우리말에 가만히 있다가 중간만 가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긴 하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경쟁과 판도 변화에 맞춰 즉시 대응하는 전략도 나쁜 전략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사실 매우 현실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한 전략이 통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재빨리 변하지도 못한 유럽은 변변한 자국 플랫폼을 키우지도 못하고 지난 수세기 세계를 주도했던 화려한 과거를 뒤로한 채 늙은 사자무리로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중국의 세계 패권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재빨리 전략을 수립하면서 나아가야 할 중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구한말 세계 열강의 다툼과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사의 희생자가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플랫폼과 AI는 디지털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 심지어 국운을 좌우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자국 플랫폼들은 소위 '플랫폼 규제론'이라는 시류에 신음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반기업적인 정치 시류와 완벽을 원하는 국민성 때문에 어떤 사안적 문제가 잠시 그리고 조금 발생해도 우리 플랫폼 기업에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과도하게 규제 체계를 만들어온 매우 유감스러운 규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환경에서 과연 우리는 매일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과 AI 기업의 탄생 및 유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디지털 중립국'에서'전략적 네트워크국'으로 전환 전략
'디지털 중립국'에서'전략적 네트워크국'으로 전환 전략

◇디지털 생태계 경쟁 속 플랫폼 기업의 전략적 의미

오늘의 디지털 기술 패권 경쟁 그리고 이제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플랫폼 기업이 단순한 기술 주체가 아니라 국제정치와 국제경제 생태계의 설계자 또는 파트너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의 플랫폼 기업 역시 단순히 국내 사용자 기반을 넘어, 국제 사회에서 '협력이 가능한 기술 파트너'로서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네이버·카카오 등은 K콘텐츠, 메신저, 클라우드, 검색, 쇼핑 플랫폼을 통해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존재감을 확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확장이 아직 정부 정책이나 글로벌 전략과 연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은 기술 기업을 외교의 도구로 활용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기술 기업을 국가 전략의 협력 자산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대세에 추종하는 '디지털 중립국'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전략적 네트워크국'으로

한국은 높은 디지털 인프라를 갖춘 국가이며, 미국·EU·일본과의 전략적 협력을 추구하는 동시에 중국과도 경제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지정학적·경제적 균형 지점에 서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소극적 중립이 아니라 능동적 연계 전략, 즉 '전략적 네트워크국'으로의 전환이다.

먼저 우리는 다자간 협력 플랫폼에 참여하여 글로벌 AI 데이터 협약, AI 윤리 원칙, 기술 표준 등에 있어 EU, 미국, 일본과 공동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중견국의 입장에서 표준화 논의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 동시에 자국 내 AI 및 데이터 자립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국가 주도 AI 데이터셋 구축 사업을 확대하고 클라우드 인프라와 법·제도를 정비해 국내 기업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플랫폼 기업의 글로벌화를 촉진해야 한다. 한국 플랫폼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콘텐츠 로컬라이징 지원, 개발도상국과의 플랫폼 협력 프로젝트 등을 통해 기업이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은 외교 전략의 중요한 동반자다

AI를 포함한 디지털 산업은 더 이상 기술·산업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교, 안보, 경제가 융합된 국가 종합 전략의 핵심 자산이다. 이제 플랫폼 기업을 기술 혁신의 주체일 뿐 아니라 디지털 질서 재편의 '전략적 파트너'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플랫폼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 결국 인식과 시선이 대상과 흐름에 영향을 크게 미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선(先)규제나 여론의 단편적 비판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국제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질서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사고다. 디지털 생태계 전쟁이 본격화된 지금, 한국은 플랫폼 기업과 함께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를 고대한다.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shpark@kinternet.org

〈필자〉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에서 법학 석사, 가톨릭대에서 조직상담학 석사를 취득했다. 네이버에서 대외협력실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컴투스, 게임빌 법무총괄 이사로 지냈다. 2018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위원회 규제심사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지식정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규제 완화, 글로벌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 억제, 인터넷 플랫폼 활성화 도모 등 국내 인터넷산업의 선순환 생태계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