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전기차 스마트 충전, 대한민국이 이미 알고 있는 길

오세영 KEVIT(한국전기차인프라기술) 대표이사
오세영 KEVIT(한국전기차인프라기술) 대표이사

1973년 대한민국은 큰 결단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치며 굳어진 110V 전력 체계를 220V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전봇대부터 변압기, 옥내 배선, 콘센트까지 전국의 모든 전력 설비를 교체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반응은 냉담했다. “성장하기도 급급한 나라에서 사치스러운 사업”이라는 반발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32년 뒤인 2005년, 사업이 완료됐을 때 한국전력은 이렇게 평가했다. 설비 증설 없이 발전소 1기를 대체하는 효과. 총 투자비 1조4000억원, 연인원 757만명이 투입된 이 대공사는 훗날 대한민국 전자산업 성장의 물리적 기반이 됐다. 그 이론적 근거를 1968년 최초로 제시한 사람은 연세대 이공대학장이던 한만춘 교수였다. 그는 월간 '과학과 기술' 기고 논문에서 전압을 2배로 올리면 전력 손실이 4분의 1로 줄어든다는 것을 수식으로 증명했다.

1998년,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선택 앞에 섰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초고속인터넷망 구축을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1982년 전길남 박사가 서울대와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사이에 구축한 세계 두 번째 인터넷 연결이 16년 만에 국가 전략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정부와 통신업계 주류는 기존 종합정보통신망(ISDN) 방식을 고수하려 했다.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이 비대칭형디지털가입자망(ADSL) 광케이블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고, 4년 만에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구 보급률 1위가 됐다. 73%. 미국, 일본, 독일을 압도하는 숫자였다.

두 사례가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인프라 전환은 현재의 수요가 아니라 글로벌 기술 로드맵과 미래 수요 예측을 근거로 결정돼야 한다. 220V 승압은 유럽 대부분이 채택한 기술 방향을 보고 결정됐다. 초고속인터넷은 미국 국가정보통신기반구조(NII) 전략과 월드와이드웹(WWW)의 폭발적 성장이라는 흐름을 읽고 선제 투자했다. 당장 국내 수요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두 사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술의 방향은 국제 표준과 선도국의 로드맵이 가리키고 있었고, 그 흐름에 앞서 올라탄 나라가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한국 인프라 전환 3대 사례 비교
한국 인프라 전환 3대 사례 비교

지금 대한민국은 세 번째 갈림길 앞에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의 스마트 전환이다.

현재 국내 전기차 충전기 대부분은 전력망과 대화하지 못한다. 충전기가 꽂히면 충전할 뿐이다. 전력망에 여유가 있는지, 재생에너지가 남는 시간인지 고려하지 않는다. 전기차 90만대인 지금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300만대, 500만대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전기차 보급률이 20%에 달하면 전체 주차면의 최소 10%에 충전기가 필요하다. 문제는 전국 대부분 아파트와 건물의 수전 용량이 그 수준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다는 점이다. 충전기를 더 달고 싶어도 건물의 전기 용량이 부족한 물리적 한계, 이른바 '인프라 절벽'이 2030년을 전후해 현실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스마트 충전은 이 문제를 푸는 핵심 열쇠다. 충전 스케줄링은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대에 충전을 집중시키고 피크 시간에는 속도를 낮춘다. 동일한 수전 용량으로 더 많은 전기차를 소화할 수 있다. 한만춘 교수가 1968년에 증명한 논리와 같다. 인프라를 바꾸면, 효율이 달라진다.

스마트 충전의 진짜 가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단계는 양방향충전(V2G)이다.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전기를 전력망으로 되돌려 보내는 기술이다. 전기차 한 대의 배터리(60~100㎾h)는 일반 가정 3~5일치 전력에 해당한다. 수백만대가 주차장에 꽂혀 있다면, 이것은 분산형 이동식 에너지 저장고다.

유럽은 이미 이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3년 발효된 대체 연료 인프라 규정(AFIR)으로 신규 충전기의 스마트 충전 기능을 의무화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전기차에 V2G 탑재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에너지위원회에 부여하는 법안(SB 59)을 제정했다. EU는 내년부터 신규 완속 충전기에 양방향 통신 국제표준(ISO 15118) 지원을 의무화한다. 유럽의 로드맵은 내년 V2G 상용화 확대, 2030년 가상발전소(VPP) 시장 통합이 목표다. 꿈이 아니라 법적 의무와 시장 인센티브가 결합된 실행 계획이다.

국내에도 스마트 충전 기술 로드맵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있다'는 안이함, 복잡한 이해관계, 단기적 비용 부담이 추진력을 약하게 만든다. 익숙한 풍경이다. 1973년에도, 1998년에도 같은 말이 나왔다.

220V 승압은 “한국 실정에 사치”였다. 초고속인터넷은 “ISDN으로 충분하다”였다. 스마트 충전은 “수요가 아직 없다”다. 세 반론의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틀렸다.

인프라 전환의 적기는 수요가 충분히 커진 뒤가 아니다. 인프라가 먼저 깔려야 수요가 생긴다. 220V로 바꿨기 때문에 더 나은 전자제품을 쓸 수 있었고, 광케이블을 먼저 깔았기 때문에 지금의 디지털 경제가 가능했다. 스마트 충전 인프라가 먼저 구축되어야 V2G 시장이 열리고, 에너지 신산업의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2030년 인프라 절벽이 오기 전에, 그 절벽을 넘을 도로를 미리 닦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 길을 걷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두 번의 경험이 있다. 세 번째 선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해야 한다.

오세영 한국전기차인프라기술(KEVIT) 대표이사 osy@kevit.co.kr

〈필자〉2014년 부터 국내 전기차 충전산업에 몸담으며, 2019년 전기차(EV) 충전 인프라 전문기업 한국전기차인프라기술(KEVIT)을 창업해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2023년에 세계최초 OCPP 2.0.1 CS/CSMS 동신 인증을 받았으며, 전기차 충전기, 충전 플랫폼 개발과 충전 운영 사업을 아우르며 차세대 스마트 충전 생태계 구축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