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연구개발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사람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보려는 연구자, 실패 가능성을 알면서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과학자, 그리고 긴 시간 축적된 지식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도전에서 한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연구자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다. 아무리 우수한 연구자라도 연구보다 행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규제의 벽에 가로막힌다면, 연구의 속도와 창의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행정 부담에 대해 시정을 요구해 온 것은 한두 해 일이 아니다. 연구 성과를 어떻게 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간에 연구비를 어떤 비목으로 집행해야 하는지, 어떤 증빙을 붙여야 하는지, 사전 결재가 필요한지, 정산 과정에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지를 걱정해야 했다. 연구비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는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세분화된 절차와 형식이 연구자의 시간을 빼앗아 왔다면 이제는 그 제도를 과감히 손볼 때가 됐다.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추진하고 있는 연구비 제도개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연구비 집행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행정부담을 줄이며, 동시에 책임성을 높이는 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연구자를 잠재적 위반자로 보는 관리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자를 신뢰의 대상으로 보고 그 신뢰 위에서 제도를 다시 설계하자는 전환이다.
연구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연구계획서를 작성할 때 모든 실험 경로와 모든 비용 항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연구라기보다 정해진 작업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 연구현장에서는 새로운 실험 재료가 갑자기 필요할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장비나 아이디어 검증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출장이나 외부 전문가와의 논의를 통해 연구 방향을 수정해야 할 때도 생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비 집행 체계는 이러한 연구의 속성과 맞지 않는 측면이 많았다. 작은 비용 하나를 집행하기 위해서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비목 간 경계가 지나치게 경직돼 있어 연구비 집행이 오히려 왜곡되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의 본질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일인데, 연구비 제도가 그 발목을 잡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제도개선은 이러한 문제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연구수행 과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회의비, 재료구입비, 출장비 등은 최소한의 증빙만으로 비목 구분 없이 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또 간접비 역시 사용이 금지된 항목을 제외하고는 연구 관련 비용에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방향이다.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에게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가 연구에 필요한 판단을 현장에서 제때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연구비 집행의 자율성은 연구자의 편의를 위한 장식적 조치가 아니라 연구개발의 속도와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핵심 인프라다.
구체적인 변화도 이미 추진되고 있다. 자유로운 아이디어 논의에 걸림돌이 됐던 회의비 식비의 사전결재 요건을 폐지하고, 소액과제의 정산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GPU와 같은 고가 연구장비의 구축·운영비를 여러 연구개발과제에서 합리적으로 배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소프트웨어 사용 계약 기간도 연구현장에 맞게 적용될 수 있도록 개선하고 있다. 어찌 보면 작아 보이는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 하나하나가 현장의 연구자에게 시간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연구비 자율성 이외에도 연구자의 행정부담 완화를 위해 다양한 제도개선을 추진 중에 있다.
첫 번째로 행정서식을 간소화할 예정이다. 그동안 국가R&D 현장에서는 사업을 관리하는 부처와 전문기관마다 요구하는 서식이 달라 연구자가 비슷한 내용을 여러 번 작성하거나 이미 제출한 자료를 다시 첨부해야 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연구자의 시간과 집중력을 빼앗는 행정부담이었다. 과기정통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행정서식을 전수조사하고, 반드시 필요한 서식은 표준화하되 단순 참고용·중복 서식은 과감히 줄여 나가고 있다(2,171개 → 154개로 간소화). 앞으로도 사업별 특성상 불가피한 서식은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고, 단계별 총량제를 통해 행정서식이 다시 늘어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갈 계획이다.
그 다음으로 연구자들이 편리한 국가R&D 지원 시스템 이용환경을 조성 중이다. 통합 로그인 전용 사이트 '연구24'를 구축해 단 한 번의 로그인만으로 다수의 국가R&D 사이트를 추가 인증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개별 연구개발기관 내부 시스템(MIS)과 범부처 통합연구지원시스템(IRIS)을 연계해 협약정보 변경(비목·연구자 등) 시 한 번만 입력하면 되도록 구조를 개선하고 있다.
2026년 하반기부터 연구관리 행정 전반에 AI를 점진적으로 도입해 AI로 평가위원을 추천하거나 챗봇으로 규정을 해석해 주는 등 AI 기반 서비스를 제공해 나갈 계획이다. 2027년부터 분산돼 있는 연구비 관리 기능을 범부처 통합연구지원시스템(IRIS)으로 통합하는 등 2029년까지 연구자가 IRIS 한 곳에서 국가R&D 전주기 행정지원이 가능하도록 개선해 나갈 예정이다.
물론 연구비 자율성을 확대한다고 해서 관리와 책임이 약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자율성이 커질수록 책임은 더 분명해야 한다. 연구자에게 더 큰 신뢰를 부여하는 만큼 그 신뢰를 훼손하는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더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대다수 연구자는 성실하게 연구비를 사용한다. 그러나 일부의 부정행위가 발생하면 그 피해는 해당 과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실한 연구자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지고, 다시 복잡한 규제와 서류와 통제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결국 몇몇 부정행위가 연구현장 전체의 자율성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행위에 대한 엄정한 제재는 연구자를 옥죄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선량한 연구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자율성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신뢰이고, 그 신뢰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가 바로 책임이다. 이번 개선안은 '사전에 모든 것을 통제하는 방식'에서 '현장은 믿되, 위반은 엄정하게 책임지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세계 각국은 과학기술 패권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양자, 우주, 첨단소재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 기술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연구개발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연구비 제도가 과거의 통제 방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창의적 연구는 세밀한 통제에서 나오지 않는다. 도전적 연구는 지나친 형식주의에서 자라날 수 없다. 연구자를 믿고, 현장의 판단을 존중하고, 실패 가능성까지 감수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될 때 창의적 연구와 도전적 연구가 가능해진다.
이번 연구비 제도개선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연구자가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 행정부담을 줄여 연구의 속도를 높이자는 것, 연구자를 잠재적 위반자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만드는 동반자로 대하자는 것이 이번 제도 개선의 핵심이다. 이 작은 개혁이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여는 첫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인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필자〉고려대 물리학과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1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입자물리학 전문가로서 1998년 미국 예일대 연구교수, 로체스터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귀국 후 2004년부터 서울시립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한국 대표하는 연구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 첫 과기혁신본부장으로서 연구현장 목소리를 수렴해 R&D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