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디지털 대전환 시대, 산업 데이터의 숨은 가치를 찾아라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얼마 전 방송에서 본 모 회사의 전기차 출시 예고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 광고에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이 일상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흥미롭다. 손녀는 음성 인식으로 음악을 틀고, 브라운관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기 위해 손바닥을 갖다 대며 박수 소리로 주방 조명을 켜려고 한다. 할아버지의 아날로그 턴테이블, 리모컨, 스위치는 아이에게 '낯선' 도구다. 심지어 자동차도 전자제품의 하나에 불과하다. 손녀가 탄 조용한 전기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는 이제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닫는 무상함이 읽힌다.

광고에서처럼 시대가 정말 변화하고 있다. 세계는 바야흐로 '대전환(Deep Change)' 시기를 맞았다. 극심한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중립을 시현하려는 에너지 대전환이 추진 중이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앞세워 디지털 대전환도 시작됐다. 대전환기에는 기존의 사회 시스템, 경제 체제, 고용 구조, 교육 제도 등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무의미해진다. 인류 전체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산업 분야의 '디지털 전환(Industrial Digital Transformation·이하 산업DX)'은 전통 산업뿐만 아니라 신산업 모습까지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산업DX는 산업 데이터를 디지털 기술로 분석해서 그 결과를 기존 제품 및 서비스 혁신이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에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철강 공급사는 제조 데이터를 수요사와 공유하고 분석함으로써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진 철강이 압력과 충격에 잘 견디는지 확인하고, 이를 공정 개선에 반영할 수 있다. 또 가전 제품 제조사는 부품 회사가 제공한 데이터와 고객들의 이용 패턴을 기반으로 하여 주요 부품 수명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부품 재고를 미리 준비하면 사후관리(AS)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ET시론] 디지털 대전환 시대, 산업 데이터의 숨은 가치를 찾아라

산업DX를 앞당기려면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는 적합한 산업 데이터 확보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일생인 수요 조사, 제품 기획, 연구개발, 소재부품 조달, 생산, 판매와 마케팅, 소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른바 산업 '밸류체인'이라 부르는 각 단계에서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가 끊임없이 생성된다. 그 과정에서 써먹을 만한 산업 데이터를 싸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획득해야 한다.

두 번째는 디지털 기술 도입과 활용이다. 산업DX의 파급력이 엄청난 이유는 단순한 공정 혁신을 넘어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방대한 산업 데이터를 모으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힘은 AI를 비롯한 각종 지능화 기술에서 나온다.

세 번째는 기업 간 연대다. 개별 기업의 디지털 전환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밸류체인 전반에 걸쳐 디지털 전환이 이뤄져야 다양한 신규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밸류체인을 공유하는 기업끼리 협력해서 가치 있는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직은 걸림돌이 많다. 데이터 축적을 위한 기술 확보에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고, 기업의 보안 정책상 다른 기업에 데이터를 개방하는 것이 어려워서 의미 있는 데이터 축적이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쓸 만한 데이터가 있어도 이를 분석하고 다룰 줄 아는 조직적 역량이 부족하면 의미 있는 인사이트 도출에 실패하기도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산업 디지털 전환 촉진법(산업디지털전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기업이 산업 데이터를 생성하고 활용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전담기관으로 지정된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앞으로 3년 단위의 산업 디지털 전환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산업 데이터 수집, 생성, 활용과 그에 따르는 수익 권리 보호에 필요한 제도적 조치를 해 나가게 된다.

KIAT는 기업이 활용할 만한 데이터 확보를 위해 이미 8개 분야의 산업 데이터 플랫폼 구축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기업의 최고책임자와 중간관리자를 대상으로 DX 인식 개선 교육을 진행하고, 중소·중견기업 대상으로 맞춤형 컨설팅도 제공했다.

특히 산업DX 확산을 위해서는 정부와 공공 부문의 노력 못지않게 민간 부문의 적극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본다. 데이터와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와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갈 주인공은 바로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산업DX를 선도적으로 추진해 온 업계와 일부 기업이 중심이 되어 '산업 디지털 전환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민간 주도의 확산 노력이 이뤄지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KIAT는 디지털 산업혁신 펀드를 조성해 산업DX를 추진하는 기업 위주로 민간 투자가 대거 유입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운영하여 기업이 원하는 규제 혁신을 빈틈없이 뒷받침하고, 재직자를 대상으로 AI 활용 역량을 끌어올려 주는 단기 교육 과정도 확대 지원할 예정이다. 이렇게 정부가 밀고 민간이 끌어간다면 산업DX 생태계는 더 빠르게 자리 잡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업의 사업화 대상이 주로 기술과 특허였다면 향후 DX 시대에는 산업 데이터의 숨은 가치를 발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 변화하지 못하는 기업은 결국 도태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 중소·중견기업들이 산업 데이터와 디지털 기술 기반의 비즈니스 혁신을 발판으로 삼아 다가올 초연결·초지능화 사회를 잘 준비해 나가길 바란다.

<필자 소개>

석영철 원장은 1994년 한국산업기술평가원에 입사, 25년간 산업기술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 온 전문가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에서 정책연구부장과 전력기획단장, 한국산업기술재단에서 정책연구센터장으로 일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에서 기술전략본부장과 기술기반본부장을 역임했다. KIAT 원장에는 2019년 3월 취임했다. 취임 이래 산업기술 연구개발(R&D) 사업을 강화하고,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사업을 확대하는 등 정부 산업기술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ycseok@kiat.or.kr